창세기 37장 43절 신실한 요셉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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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0월 둘째주일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존귀하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께서 존귀하게 높혀 주실 때, 존귀하게 되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으로 높혀 주시고, 하나님깨서 지혜로 높혀 주시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재물로, 성공으로 높혀 주실 때, 높아지게 되어 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좋은 것을 주시며, 높아지게 하여 주십니까?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한자, 사람앞에 겸손한자를 하나님께서 높혀 주시는,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를 높혀 주십니다.
‘신실’은 밀을신 열매 실...입니다. 국어사전으로는 ‘믿음직 하고 착실하다’ 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직하고 착실한~, 신실한 자를 높혀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신실한 요셉’X2 이 되겠습니다.
1. 요셉은 신실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41절 4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옛날 우리나라에서 과거급제를 하면, 특별한 사모관대를 합니다. 머리에는 ‘어사화’ 라고 하여서, 꽃모양으로 장식된 ‘사모관’을 씁니다. 멋있는 ‘관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가마에 태웁니다.
아전들이 말합니다. “물럿거라... 장원급재하신, 나리의 행차 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요셉은 장원급제가 아니라, 바로, 애굽의 총리--애굽의 영의정으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는, 왕의 인장반지를 받아서 낍니다. 즉 왕의 도장으로 왕을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 합니다.
옷은 세마포 옷을 입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수레는 ‘버금수레’를 탑니다. 버금은 두 번째,라는 뜻입니다. 으뜸, 버금,
영어로는 ‘채리오트, 에즈, 세컨드 인 커맨드’ ‘2인자’, ‘두 번째 사령관’이 타는 수레가 되겠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영의정이 되어서, 버금수래에 오릅니다. 관리들이 말합니다. “엎드리라. 애굽의 영의정 이시다.~” 사람들이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요셉이 과거시험을 보아서 합격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장군이 되어 훌륭한 공을 세워서, 높아 졌습니까? 아닙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요셉은 왕의 감옥에 갖혀있는, 죄인 있었습니다.
신분은, 장군 보디발의 ‘종’의 신분 입니다.
그런데, 단 한번, 왕의 꿈을 해몽하여 주고, 순식간에, 억울한 누명을 벗고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고, 바로 애굽에서 가장 높은 ‘영의정’으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런 드라마틱한, 존귀함으로의 변화, 어떻게 가능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신실함’으로 살아갈 때, 존귀하게되는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이 얼마나 신실하였는지~ 3군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에는 말씀합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인을 섬기는 종이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자 이런 상황,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나를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이 밉지 않을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상황은, 너무너무 절망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 이런 절망과 분노의 상황에 처하게 되면, 보통사람이라면, 정상적으로 살아갈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신세와 상황을 생각해볼 때, 억울함과 분함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생활은 커녕, ‘자포자기’,‘저주분노’로 ‘폐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 자리에서 ‘신실’하였습니다. 자기를 사서 종으로 부리게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신실하게 일을 합니다.
보디발 장군이, 요셉의 신실함을 보고, 얼마나 ~ 믿음직하고 착실하게 일하는 것이 맘에 들었으면, 요셉을 자신의 가정의 총무로 삼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신실함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신뢰가 가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위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억울하게 종으로 팔리고, 절망의 자리에 있었지만, 탁월한 신실함으로, 철저한 믿음직 함으로 살아갈 때, 오히려, 보디발 장군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절망의 자리에서 신실하였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는 신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절망을 탓하며 신실하지 않고, 불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절망의 자리에 처할지라도, 신실함으로 살아갔습니다.
또, 창세기 39장 9절 하반절에 말슴합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어, 신실하게 모든 일을, 너무 잘하는 것을 보고,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을 합니다.
“나와 같이 사귀자~” “나와 같이, 동침을 하자”
종으로써, 주인의 아내가 자신을 좋게 보고, 특별한 관계가 되어, 자신을 잘~ 보살펴 준다면....요셉으로써는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습니까?
종으로써, 이러한 유혹을 모른채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주인의 아내에게 잘 보여, 종의 신분을 면하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주인의 아내에게 잘 보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수만 있으면 좋을텐데~
갖가지 생각과 가능성으로, 마음이 심란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단호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은 ‘유혹’앞에 신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쉽게 가는 방법을 택할 때, 떠 잘될수 있다는 유혹은, 항상 사탄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는, 중요한 유혹의 방법 입니다.
요셉도 그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보디발 장구의 아내가 나를 돌봐 준다면, 나는 더 쉽게~ 더 잘될수 있을텐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하라라는 대로 살아가야 되겠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한 유혹의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신실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결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유혹, 불신앙의 유혹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을, 존귀하게 높혀 주십니다.
신명기 7:9 에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을 높게 인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기 깨문에, 하나님 앞에 불성실하고, 불의한 사람을 낮게 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실한 사람에게는, 천대까지, 성경말씀에 있는 그데로 지켜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요셉이 높아지게 된 것은, 절망중 신실하였던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불신앙의 유혹 앞에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였, 습니다.
또 창세기 39장 23절에는 말씀합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 거절할 때, 보디발 장군의 아내는, 요셉을 좋아하던 마음이 돌변하여, 요셉을 극도로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요셉이 오히려 자기를 겁탈하려 하여 혼났습니다. 저 나쁜 히브리 종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요”
그러니까, 보디발 장군이 화가 나서, 요셉을 왕의 감옥에, 들어가게 합니다.
즉, 요셉으로써는,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되면, 누구라도 힘들어 하게 됩니다.
환경이 그냥~ 바뀌어도 적응하는데 한참은 걸리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더~ 나쁘게 바뀌면, 힘들어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신실하게 살아가는데, 자꾸 상황이 더 나쁘게 바뀌게 되면, 보통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행동에 한번쯤 질문을 던질수 있습니다.
너는, 신실하게 살아간다 하는데 얻은것이 무엇이냐?~
형들에게 버림받고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신실하게 살아갔더니, 이제는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미움을 받아 죄수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신실함은, 지금 당장의 상황만 본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신실함의 생활자세를 고수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섞은 것이요,
가끔씩 기름칠을 하듯이, 불성실 하여도 무방하고,~
더구나 성경말씀대로가 아니라, 세상방식대로 살아야, 더 잘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해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옥중에 들어가서도,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변화가 심한 상황에서도, 더 나쁘게 바뀌어도, 자기 스스로에게, 신실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스스로, 내면에서, 자기를 향한 질문이 나올 때, 흔들리기가 쉽니다.
“너의 신실함은 틀렸다.~”
“너의 신실함은 소용이 없다.~”
“너의 신실함은 어리섞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내가 나를 향하여, ‘나는 틀렸다’는 질문이 나올 때, 사람은 누구나 심각하게, 그동안 내가 걸어왔던 방식에 의구심을 가지고, 심지어는 신실함의 방법을 멈추게 되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 스스로의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나는 종으로 팔려도, 믿음의 사람으로써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나는 미움을 받고 왕의 감옥에 들어가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참 신실’은, 변함이 없는 신실입니다.
큰 성과, 큰 축복을 받으려면, 변함없는 신실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상황이 더 나쁘게 되어, 종이 아니라, 죄수가 되었지만, ‘신실함’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게서 신실한 요셉과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왕의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자~ 내 몸이 아픕니다. 그래서 약을 먹으면, 약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아픈것이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약이 몸속에서 약효를 내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상황이, 왕의 감옥에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신실함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면, 당장 요셉이 짠~ 하고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혀주시--역사가 일어나는 동안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는것은, 지금 당장의 상황은 왕의 감옥이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 되니까...요셉이 높아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술맡은 관원장, 떡굽는 관원장을 감옥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꿈을 요셉이 해석하도록 하여 주시고,
그다음에, 애굽의 왕이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의 뜻을 몰라, 수소문을 하게 만들고~
즉 시간의 경과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신실한 요셉을 보시고, 역사하여 주시니까,
요셉이 애굽의 영의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 결국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높혀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종으로 팔렸을 때, 불성실 하였 더라면,
만약에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 앞에 불성실 하였 더라면,
만약에 요셉이, 왕의 감옥에 들어가서, 이제는 신실함이 쓸모 없구나,~ 불성실로 살아야 되겠다고 하였 더라면...
요샙이 애굽의 총리로 높여지는 것은, 절대로 존재할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신실한 것은,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높혀주시는, 출발점이요, 시작이요,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지금 상황이 너무너무 잘되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않살아도 부족한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불성실 하게 살아가는것은,~ 지금당장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그 불성실의 영향을 언젠가는 나타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28:18 에는 말씀합니다.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갈라디아서 6:8, 에 말씀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요셉은 신실함을 심어, 존귀함을 거두었고,
또한 하나님 앞에 신실함을 심어, 하나님의 인도하여주시는 역사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신실함을 심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도 신실함으로 심고 있습니까?
상황이 너무너무 좋으니까? 신실함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혹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실실함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요셉의 여정을 살펴보시고 역사하여 주셨던것 처럼,
오늘날 우리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여정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펴보시고, 역사하여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조금만 인내한다면, 심은 것은 분명히 나타나게 되어 집니다.
신실함으로 심은 것은, 분명히 존귀함으로 열매가 열리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요셉은 절망가운데, 사람앞에 신실하였습니다.
세상 유혹중에, 하나님 앞에 신실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중에, 자기 스스로에게 신실하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신실이, 열매맺게 하여 주셔서, 애굽의 영의정, 애굽의 총리로 바뀌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번 한주간 동안도, 김포상도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신실함으로 심으며 살아가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심으로,
좋은 열매, 응답의 열매, 높아짐에 열매를 거두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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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오늘도 항상 동행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써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고, 열매맺게 하여주시고, 높아지게 하여 주셔서,
요셉처럼 신실함으로 승리하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로 , 한주간동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