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15절 24절 교훈이 긍정으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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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달은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한 달’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는,‘긍정맨 베드로’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고깃배에 모셔 드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마칠때 까지, 인내하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깊은데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갑절에 물고기를 잡는 ‘긍정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갑절의 물고기만 보고 흡족해~한 것이 아니라, 그 물고기를 잡게 하여 주신 분을, 바라 볼줄 았습니다.
그래서, 갑절에 물고기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깊으신 뜻과 부르심을, 발견하고 깨달아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긍정맨 베드로’ 그 다음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이번 주간에는 광복절이 있습니다. 광복절은 ‘기쁨’과 ‘슬픔’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다시 나라를 되찾은 것은 말할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지만 나라를 잘 간수하지 못하여, 일본에게 잃어버렸던 것은 ‘슬픔’이 아닐수 없습니다. 또한 나라를 잃어버린 그 다음에 받은 고통은, 말할수 없는 ‘슬픔’ 입니다.
자, 슬픈역사는 부끄러운역사 니까, 지우고 싶습니다.~
일본에 식민지가 되어서 살았던 부분은 이야기 하지 맙시다~....... 아닙니다. 오히려 ‘광복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광복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반복되지 않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실수는 누구나 할수 있지만, 실수를 망각하고 계속 반복된다면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배드로’는 처음부터 긍정적이고,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줄여갈때에~, ‘완성되는 제자’, ‘온전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1. 천국열쇠를 잃을 뻔한 베드로가 되겠습니다.
자, 부모님이 어린아이를 볼 때 너무너무, 이쁘지요. 코도 똘망, 눈도 똘망...
부모님이 어린아이에게 가르쳐 줍니다. 아빠아빠~ 엄마엄마~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아바아바, 어마 어마
“우리 아이 최고다~”
아이가 어린이로 자라 납니다. 엄마 묻습니다. “내가 누구야?”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엄마~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요? 날 나아주신 엄마 잔아요”
반대로, 부모님이, 어린아이게게 가르쳐 줍니다. 아빠아빠~ 엄마엄마~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소~소~ 말~말~
아이가 어린이로 자라 납니다. 엄마가 묻습니다. “내가 누구야?”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아줌마는, 누구세요 ? ”
아이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도대체 누구세요. 뭐 때문에 평생 나하고 같이 살고 그러세요. 참 답답하네요”
~그러면 부모님이 정말~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깨우쳐 주십니다.
진리와 섭리와 은혜를 끼쳐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저기 사람들이 그러는데,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좋으셨을까요? 답답하셨을까요?
그동안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섭리와 역사가 은혜가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매일 동행하여 주신 것이~ 그냥 동행하여 주신것입니까? 그속에 뜻이 다~ 들어있고, 교훈이 다~ 들이있고, 깨우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3년동안 매일 동행하여 주시고, 보여주시고, 은혜를 주셔도, 영의 눈을 열리지 않아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못다고, 다른 대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이 그러던데..., 세례요한 아니세요? 엘리야 아니세요? 예레미야나 선지자 아니세요? 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매일매일 예수님의 역사, 동행, 은혜...그렇다면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구나...
그래서 예수님 주 되심, 그리스도 되심, 살아계신 성자 하나님 되심을 고백을 합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마치 부모님이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아빠아빠~ 엄마엄마~”라고 아빠를 향하여, 엄마를 향하여 말할 때.. 그 말를 듣고,
“우리아이가 드디어 말을 하는구나~ 우리아이 너무너무 똑똑해요. 우리아이는 천재가 아닐까요..?
예수님은 평소 우리와 매일매일 동행하시고, 나의 생활 가운데 섭리하여 주시고, 나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실 때..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고, 고백할때...너무너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을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칭찬이라는 칭찬은 아낌없이 하여 주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네가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너에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자,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장면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마지막날에 천국문 앞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실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럴 때, “아저씨, 누구세요? ”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잘~ 대답했구나. 천국에 어서 들어가거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못알아 보고, 예수님을 아저씨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예수님과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널, 위하여 십자가를 졌는데...” “언제 날 봤다고 자꾸 그러세요....”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매일매일 너와 동행하였는데...”
“매일매일 언제 나하고 동행했어요? 나는 아저씨 같은 사람을 매일매일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그리스도인은, 오늘도 매일매일 나와 동행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깨닫고, 바라 볼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인도하심과 섭리하심 가운데에 서서, 나를 구원하신 나의 구주로, 예수님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 납니다.
베드로를 칭찬하여 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여 주시듯, 모든~사람들을 사랑하여 주시고, 모든~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십자가는 봉사의 길이요, 희생의 길이요, 내가 죽는 길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할때는 이해가 않됩니다. 불합리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 사람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 알수 있겠습니까? 자기분야는 잘~알아도, 다른~분야는 모르는것이 있습니다.
벌써~ 스마트폰만 하여도, 최첨단 기능은 모르는 것이 수두록 합니다.
동네마트가 할인행사를 하여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가서 물건 다~팔리고 아까워하는 경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않된다고, 동의가 않된다고, 내 방식과 않맞다고, 부동의하고,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깊으신 뜻을, 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서...
내가 생각할때는, 그건~ 아니라고, 대단하게~ 부정을 합니다.
22절 상반절에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의 그리 마옵소서”
그럴 때 2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가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하면, 방금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여, 다른 제자들 앞에 칭찬이라는 칭찬은 다~ 받아서, 우쭐하였는데,
그것이 교만이 되고, 오바가 되어서~
자신의 판단은 맞고, 자신의 생각은 칭찬받을수 밖에 없는, 대단한 판단이요, 대단한 생각이라고 여기고,...십자가의 길을 부인할 때,
반대로 다른 제자들 앞에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엄청난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일과, 나의 성숙은~ 나의 능력과 수준에 나오는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와 순종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베드로가 자신의 생각과 수준을 신뢰하고,
자신의 생각과 수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할 때, 도로 제자리 걸음이 되고,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긍정과 성숙을, 나의 능력에 의지하고, 나의 수준에 의지하고, 나의 판단과 건강과 상황에 의지해서는 않되겠습니다.
2. 긍정과 성숙함은 상승효과를 일으킵니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데,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옵니다. “뭐, 먹을~래요. 짜장~면요. 짬뽕~요…?” 중국사람인것 같기도 하고, 조선족 같기도 합니다. “짜장면 주세요.”
옆 테이블에 가서 또 뭍습니다.
“뭐 먹을~래요..?” “에?”
“짜장면~ 짬~봉…” “아~ 짬~뽕, 주세요”
식탁에 아저씨들이, 중국사람인것 같기도, 조선족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서로...중국어로 말하면, 더~ 쉬울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국사람인척~ 하고 싶은가?, 한국사람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본문으로 돌아와서,
베드로만 이런 실수를 하느냐? 사실은 제자들의 믿음이 비슷비슷합니다.
도토리 키제기입니다.
아직은~ 믿음이 부족하고, 아직은~ 예수님의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이 어눌하고, 아직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눌합니다.
예수님께서 매일매일 동행하여도, 그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섭리하여 주셔도, 그 크신 은총과 사랑을 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배드로’는 처음부터 긍정적이고, 처음부터 성숙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앞으로도 큰 실수를 몇 번이나, 더 하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줄여~갈때에, ‘완성되는 제자’, ‘온전한 사명자’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자 어떻게 걸어 갑니까? 제자들이 함께 걸어 갑니다.
물론, 가룟유다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는, 제자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모이기를 힘씁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에 보면, 제자들이 모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장 26절에 보면, 가룟유다를 대신, 맛디아를 세워서, 빈자리를 체웁니다.
자~ 그럴 때, 사도행전 2장 1절,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하게 임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다른제자들과 함께,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데 까지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하지 못하지만, 내가 할수 있는데 까지, 나의 십자가를 지면서 살아갑니다.
그랬더니, 베드로에게 능력과 은혜의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에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3천명의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 할꼬?” 회개하며
세례를 받으며, 초대교회에 큰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긍정과 성숙함은 상승효과를 일으킵니다.
한번, 잘 했다고 우쭐하지 않고, 한번 못했다고 낙담하지 않고,
시행착오가 생기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며 걸어갈 때..
긍정이 온전하여 집니다. 성숙이 온전하여 집니다.
어떤 목사님이 고백을 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평생 행복하고, 좋은 동업자를 만나면 사업이 풀리고,
마찬가지로, 좋은 신앙의 파트너를 만나면, 힘들때 서로 기도하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듯,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언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전라북도 금산에 가면,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일제시대때, 금산교회에는 ‘조덕삼’이라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금산에 ‘거상’입니다.
한편, 그 집에 ‘이자익’ 이라는 머슴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머슴이, 주인어른 나도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머슴을 데리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머슴의 믿음이 쑥쑥~ 자라 납니다. 자, 방금 말씀드린 ‘긍정과 성숙함의 상승효과’가 시작이 됩니다. 성도들이 다들 ‘이자익’ 머슴의 믿음을~,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합니다.
시간이 흘러, 그 교회 장로님을 세우게 되는데, 이자익 머슴이, 조덕삼 주인보다 먼저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머슴보고, 장로님, 장로님...하면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당시에는 목사님이 잘 없습니다. 그러니까...조덕삼 집사님이, 우리 장로님을, 신학교에 보냅시다.~
나중에 목사님이 되니까, 그때는 조덕삼-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이자익-목사님을 우리교회에 담임목사님으로 모시도록 합시다.~
나중에 ‘이자익’-목사님이 유명해져서, 우리나라 장로교회 전체를 대표하는,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조덕삼-장로님과 금산교회 성도들의 긍정과 성숙함은,
일제시대때, 소망없을 때에, 머슴도 예수 믿으면, 총회장이 됩니다.~
교회안에는, 신분과 절망이 없고, 긍정과 성숙함이 가득합니다.~
우리나라가 나가야할, 긍정과 성숙함의 방향을 제시하는, ‘좋은모델’이 되었습니다.
즉, 광복을 맞이하여 독립을 하면, 다시 ‘양반과 상놈’과 ‘주인과 머슴’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국민이 어떻게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지,
서로 높이고, 서로 사랑하는, 긍정과 성숙함의 모델을,~ 금산교회 성도들은 먼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베드로는 매일매일 동행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음으로 고백하여,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할 때 책망을 받았습니다.
한번 긍정하고 성숙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넘어서, 긍정과 성숙함이 반복될 때, 상승작용이 일어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긍정과 성숙함의 믿음생활을 할 때, 상승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믿음생활로,
베드로는 온전하고 능력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일제시대때, 세상을 향하여 소망을 주었습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서로함께, 마음을 나누고,
또한 매일매일.....긍정과 성숙함으로 생활하여,
소망과 큰~역사속에 살아가는, 은헤의 한주간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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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나라에 광복의 큰 역사로 동행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날, 매일매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고백하며,
또한 긍정과 성숙함으로 생활을 하여, 큰 칭찬과 상급을 받는 믿음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초대교회처럼, 우리나라 초기교회처럼, 서로 긍정과 성숙함으로 섬기고 함께하여.....세상에 빛과 소금과 소망을 보여주는,
성도로 생활하고, 교회로 우뚝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 동안, 나에게 찾아오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여 주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긍정과 성숙함으로 보내는, 한주간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리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