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장 3절 9절 성 잘내는 요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
8월달은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한 달입니다.
요즈음 같은 때에, 그리스도인에게는 긍정과 성숙함이 더욱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긍정과 성숙함의, 최고 목적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긍정과 성숙함을 회복 하는데, 그렇다면 어디에까지 회복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결론은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잃어버린, 그~형상을 회복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주인공은, ‘성 잘내는 요나’ 선지자가 되겠습니다.
1. 요나 선지자는 긍정과 성숙함이 부족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똑같은 장면이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3절에 말 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4절에 말씀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밑으로 내려가서 요나 선지자가 8절 하반절에 말 합니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께서 9절 상반절에 말씀 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렇습니다. 요나는 일만 있으면, “죽는 것이, 사는것 보다 났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요즈음 세상 표현으로 본다면....‘죽겠다’고 하는 말이, 입에 달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특유에 어투가 있습니다. “정말, 와~, 대단하다. ” 관용어 라고 하지요.
관용어를 살펴보면,
긍정적이고, 상대방을 칭찬하는 관용어가 있습니다. “멋있습니다. 잘했습니다.참 좋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이고, 비난하는 관용어도 있습니다.
“그럴줄 알았습니다.~ 어떡게 할려고 그랬을까?, 큰일났다.~”
요나 선지자에게 있어서, 관용어는 무엇입니까? “죽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에 말씀을 전하라고 하니까...“사는것 보다, 죽는것이 났겠습니다.”
박넝쿨이 마르니까 “사는것 보다, 죽는 것이 났겠습니다.”
자~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너의~관용어가, 왜 부정적이냐?’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4절에도, 9절에도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요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요나의 관용어 속에는, 성~내는 요나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의 말에서,......성내는 요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의 행동에서.... 성내는 요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매사에, 생활에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성내는 요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대하여, 요나전체의~ 인생여정을 살펴보면, 요나 선지자의 그래프를 그릴수 있게 됩니다.
요나서 1장에,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니까, 그게 하기 싫어서, 요나는 반대로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요나서 2장에,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서, 요나는 바다에 던져 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큰물고기를 준비하여,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생명을 보전 합니다.
이때 요나는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요나서 2장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서 3장에,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고, 니느웨로 가서 보니까..니느웨가 얼마나, 큰지 걸어서 3일이나 걸리는, 큰~성읍 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루만~ 말씀을 전하고, 니느웨 동쪽에 움막을 짓고, 니느웨를 지켜 봅니다.
요나서 4장에, 한편, 니느웨성읍 전체가, 왕으로부터, 백성, 심지어는 가축들 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요나 선지자가 전한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니까..요나가 죽겠다고~ 심통이 나고 배가 아퍼서~, 성을 냅니다.
자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회개-하는 것이, 속상한 것입니까?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과 격려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않망하는 것을 보고는, 심통이 나고 배가 아파서, 죽겠다고 성을 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여정을 그래프를 그리면, 갈 지자에, 성격은 배배 꼬이고, 심보는 남이 않되고 망하는 것을 기다리는, 마이너스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9절을 보니까, 더욱 가관인 것은, 요나 자신이 만든 움막에 ‘박넝쿨’이 죽었다고, 죽기까지~ 성을 냅니다.
속이 좁아도 너무너무~ 좁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요나, 선지자의 직분을 받은 요나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심은 박넝쿨이 죽었다고, 죽기까지 성질을 내는, 철저하게 긍정과 성숙함이 아니라, 부정과 미성숙함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 물건이 언제 고장이 나게 되는 것입니까? 목적대로 않쓸 때, 고장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에는 기름을 넣어야, 잘 돌아갑니다. 그게 자동차를 만든, 엔니지어가 설정한, 사용방법이요, 목적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동차에 기름이 아니라, 물을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시동을 켜면, 그 자동차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자동차 엔진이 망가지고, 고장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사용방법과 목적이 있게 만들어 졌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은 영어로는, 이마고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챌렘’입니다.
‘챌램’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원본의 그림자’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또 ‘모양’ 이라는 말은 영어로 ‘라이크~니스’ 히브리어로는 ‘드무트’ ‘다마’입니다. ‘닮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아담을 만드실때, 하나님의 모양-여호와 다마로, 만드시니까.., 그 흙--‘아다마’는.... ‘아담’이 되어 집니다. 하나님을 닯은, 고귀한 사람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여호와 다마가 들어 있는, 아담은... 얼마나 능력이 있고, 은혜가 있고, 형통한지...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방법대로 살아살 때, 사람은 만족하고 평안하고 기쁘고, 은혜롭고, 형통하고, 복스럽게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렇다면, 아담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여호와 다마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흙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 속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신령함과 은혜들을, 담으면 담을수록
힘이 생기고, 능력이 나타나고, 형통과 사랑과 기쁨속에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자꾸 이상한것을 담을 때는....
아무리 담아도, 계속하여 뭔가 부족한것 같고, 모자라고, 성냄은 더 생기고, 욕심이 더 발동하고,
힘은 빠지고, 능력은 않나타나고,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형통이 아니라~하는 것 마다 않되는...
그래서 요나처럼, 박넝쿨 때문에, 자기의 생명이 없어져 죽어야 겠다고, 성을 내는,
이해않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혹시나, 목사님~ 요즈음 재가 힘이 않나고, 하는 것 마다--뭔가 계속하여 소소하게 일이 생기고,
성질은 더 생기고, 욕심이 더 발동하고...
그런데.. 주위사람은 보는 사람마다 미워 보이고,
너무너무 죽겠습니다.~~
그러면, 내 속에....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거룩한 은혜들이 가득 들어 있는가?
혹시 다른것을 담아서, 내속에 고장난 부분이 생겼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원래 만드신 거룩하신 뜻대록,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엄청난 역사와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례로, 사람은 코로나 때문에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만...
개구리들은 와호균 때문에, 전세계의 개구리들이 몸살이 아니라, 멸종을 걱정해야 할,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내용을 보니까, 요지간에 50년 만에, 지구상에 있는, 모든 개구리의 3분의 일이 죽었다고 합니다.
양서류 90종은 멀써 멸종을 하였고, 124종은 개체수가 90프로가 죽어서, 멸종단계에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심상찮습니다. 엄청납니다.
어떻게 요50년 만에, 지구 전체의 양서류와 개구리의 3분의 1일 죽고, 멸종하는, 일이 벌어질수 있습니까? 전세계 과학자들이 조사를 해보고 , 놀랍게도, ‘한국’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50년 만에...지구상의 양서류 3분이 1이 죽고, 멸종하고 있는 원인이, 왜 ‘한국’ 때문인지,상황은 이러합니다.
6.25 이후에, 우리나라가 너무 어려우니까... 팔수 있는것은 무엇이라도 내다 팔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다람쥐도 많이 수출이 되었고, 이때, 한국의 ‘무당개구리’가 이쁘다고..
애완용 관상용으로 전세계에 팔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무당개구리’에게는 ‘와호균-항아리곰팡이균’이 있는데, 우리나라 무당개구리는 면역이 되어 있어서, 그르려니하고 지장이 없이 살아 갑니다.
한편 무당개구리를 기르다가 버리고, 탈출하고...전세계의 강과 하천에 한국의 무당개구리가이 흘러들어가면서, 무당개구리의 와호균이 전염되기 시작합니다.
와호균에 면역이 없던 전세계 양서류들은, 손쓸틈도 없이, 죽기 시작 하여서, 미국,남미,아마존,유럽,아프리카의 모든 개구리들이...단 50년 만에....3마리중에 1마리꼴로 죽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서류 90종은, 종자체가 아예 사라지고, 124종도 멸종선고를 받고,...지금도 현재 진행중입니다.
2018년 사이언스지에....‘와호균의 시작은 한국 무당개구리’라는 특집논문이 올라오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와호균 사건’은 인간의 무분별한 행위가, 생태계에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이 사례로, 경각심을 주는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영적으로도, 비슷한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서, 최고로 존귀하고, 복되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원래 사용방법대로만 살아가면, 천마무적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고, 복되고, 은혜가운데 살아갈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죄가 들어와서, 작동이 멈추고, 오히려 역작용을 하는 비극이, 곳곳에서 발생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 주셨는데, 아담이 죄에 빠지고, 아들을 나았는데, 창세기 5:3 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낳은 아이-- 셋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없었습니다.
아담의 형상과 아담의 모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잃어 버리고,
아담의 형상과 아담의 모양을--입은 존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때, 나오던 그 능력과, 힘과 사랑과 행복과, 좋은 것 사라지고,~
이제는 땅이, 사람 앞에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땅이 엉겅퀴를 내어, 사람을 대적합니다.
인생이 사람에게, 형통과 평안으로 길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각종 나쁜것을을 내어, 고민하고 괴롭게 만들고, 대적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성질이 끝없이 하늘을 찌릅니다. 욕심이 끝없이 하늘을 찌릅니다.
하지만, 욕심대로 다 하여도, 욕심대로 다 가져도.. 만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할 때, 거룩하고 만족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고장이 나니까...다른 어떤것으로, 채우고 담아도...고쳐지지 않고, 만족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한가지 방법이,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복음’..‘복된소식’이라고 하지요.
고린도전서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아담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여호와-다마가 사라지고...흙으로만 남은 자가 되어...
그 ‘흙의 형상’을 입고, 닮게 된 우리는...
이와 같이,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 이지요....
예수님의 형상을 입고, 닮을 때.....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 시작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시기에, 예수님을 입고 닮으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수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3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근본 본체의 형상이시며,
예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수 있으시며,
예수님은,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죄를 도말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입고, 예수님을 닮으면...고장나고, 망가지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고, 되찾고, 덪입을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여호와-다마’...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되찾고,
처음처럼....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 ‘생령의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역사적, 정치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의미에 자리 임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귀한 자리임을 분명히 바라보고,
오늘 ! 예수님의 형상을 덪입고 닮기를 힘써...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한 생활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은 죄 아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아래에서, 잃어버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할수 있는, 자리에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명과 직분을 받고도, 니느웨가 회개하고, 박넝쿨이 마를때, 성을 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것으로 아무리 담고, 채워도, 고장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속에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던, 목적과 모습과 행복을 회복할수 있습니다. 긍정과 성숙이 충만할수 있게 됩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예수님 아래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로써,
한주간 동안... 힘써...예수님을 입고, 닮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와 은혜속에 살아가는 한주간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회복하고 되찾을수 있게하여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내속에 혹시 다른것이 담겨져...하나님의 형상을 고장내는 것이 있다면, 십자가의 피로, 씻고 깨끗하게 닦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매일매일 예수님을 형상을 입고, 닮기를 힘써...이제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은혜대로 살아가는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오며...
그리하여, 성격과 성품과 판단과 행동이,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하게 되어 살아가는,
한주간으로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