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6절 칭찬받은 데살로니가교회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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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의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처처에 난리의 소문이 있습니다.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버어마, 필리핀에서...분쟁과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일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연일, 미사일을 쏘아서, 이젠 평범하게 느껴지기 까지 합니다.
이러한 세계의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대한민국에 있습니까?
사람의 양심과 이성에 있습니까?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세계의 희망은 강대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품고 있는 교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희망을 교회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망을 감추셨습니다.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알아낼수 없습니다. 희망을 발견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고 절망 밖에 뿐이라고, 탄식을 합니다.
이 세상을 절망의 세상이니 절망속에서 살아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희망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갑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희망의 밭을 소유한 주인공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의 힘과 능력과 소망을 세상에 두지 않습니다.
나의 힘과 능력과 심지어는 인생 전체를, 바로 그 밭을 사는데 사용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밭을 소유하고, 그 희망을 내것으로 만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한 것을, 나 혼자 발견할 때 기뻐하게 됩니다.
과학자 뉴튼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 사실을 숨기고 아무에게도 가르켜 주시 않았습니다.
다른 과학자들이 문제를 못풀어서 끙끙앓고 있을 때, 슬쩌기...답이 있는 것을 가르켜 줍니다.
다른 과학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알수 있도록 책을 써서 알려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못하여 쓴 책이, ‘프린시피아’ 라는 책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가지지 못한, 희망을 소유한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서 발견할수 없는, 영원한 소망을 소유한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6절에 보니까..“성령으로 기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은 나만이 받은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럴 때 기뻐할수 밖게 없습니다. 싱글벙글 할수 밖게 없습니다.
이 기쁨은, 기도한 사람만 가지는 기쁨입니다.
기도 않안 사람은 소유활수 없는 기쁩입니다.
“뭐가 그렇게 기뻐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를 못합니다.
“그게 그렇게 기뻐요..?”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간절히 성경 말씀을 보았는데, 나에게 주시는 엄청난 큰복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나만 발견하고, 나만 은혜받은 말씀입니다.
성경말씀 않읽어본 사람은, 이해할수 없는 기쁨입니다.
“뭐가 그렇게 기뻐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가 않됩니다.
“그게 그렇게 기뻐요?”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나사 빠진것 처럼, 싱글벙글 합니다.
힘들때도, 고달플 때고, 그 발견한 것만 떠 올리면...찬송이 절로 나옵니다. 아멘이 절로 나옵니다.
내가, 성령님께서 주신 기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 상반절에 보니까..“.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 있다고 말할 정도로,
믿음생활 하기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생활 하는 것을 훼방하는 여러 가지 악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데살로니가 동네가 얼마나 궤팍스러운 동네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전도하니까..불량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소동을 하면서 훼방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숨죽이고 있다가 밤에, 데살로니가를 빠져 나올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동네인 베뢰아로 갔습니다. 베뢰아에서 전도를 하니까..베뢰아 사람들은 딴판입니다. 복음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 모릅니다.
사도바울이 너무너무 마음이 놓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참 신사적이구나..”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베뢰아에 까지 몰려와서, 바울을 핍박을 합니다. 괴롭힙니다.
정말 대책이 없고, 너무나 불량스러운 사람들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 그런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얼마나 핍박이 심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님이 주신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더 나가, 기쁨으로 믿음생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6절 하반절 보니까...“우리와 주를 본받는자 되었으니” 즉 예수님을 본받는 모범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진흙에 숨겨진 진주와 같은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였던 것입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는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숨겨진 보화같은 교회, 숨겨진 진주같은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로마교회 처럼, 큰교회도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 많이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같은 자리에서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복음의 사명을 감동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도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감사와 기쁨으로 믿음의 사명을 잘 감당해 가면,
예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 받았듯이, 우리 김포상도교회도, 김포상도교회 모든 성도들도 칭찬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어떤 공동체를 이루었습니까?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 소망 사랑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1장 3절에는 순서가 좀 다릅니다. 믿음, 사랑, 소망이 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니까..‘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사랑, 소망이 되겠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역사가 있는 동체,
사랑의 수고가 있는 공동체,
소망의 인내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 대통령 선거 있게 되었습니다.
한 후보가 말합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면, 아파트 값을 껌값으로 만들겠습니다.”
이 사람, 저사람 해 보아도 다 그게 그것이니....아파트 값이나 껌값으로 만들자고,
정말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기다립니다. 매스컴도 관심을 집중합니다. “정말 아파트 값을, 껌값으로 만들수 있을까?”
대통령이 되자 말자 특별 발표를 하였습니다. “내일부터, 껌값을 대폭 인상하게 되었습니다. 껌값은 2억 5천만원이 되겠습니다.”
결국 껌값하고 아파트 값하고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살을 왕창 뺄수 있습니다.
가입 하기만 하면, 선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사실 그럴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어떻게 성숙하고 깊어질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신령한 교재를 나눌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박해가 심한 곳에서, 칭찬받는 모범된 교회를 세울수 있었습니까?
그 과정이 분명하였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왜 이렇게 그래프가 내려가고 있습니까?
물론 힘있게 성장을 하였기 때문에, 잠깐 숨고르기를 하는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래프가 내려가는 과정이라면 너무나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폭팔적인 성령님의 역사의 시대입니다.
사실 오늘날 처럼, 기독교가 폭팔적으로 전파되고, 확장 되는 때도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스라엘, 로마 에만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대, 16세기는 유럽에만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18세기 19세기에는 물론 선교사들이 엄청나게 세계로 나가서 전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인도 선교를 그렇게 해도, 실패하였습니다.
중국에 어마어마한 서양에 선교사들이 가서, 중국선교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실패하고 모두 철수할수 밖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전 모든 시대에 전도된 숫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교인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셀수 없이 많은, 큰 교회들이, 자생적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베트남, 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야에 엄청나게 많이 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학교를 세우고, 유치원을 세우고, 학원을 세우고...
이 어린이들이 자라나면,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야는 많이 틀려 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만, 오히려 그래프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결론은 한국 교회가,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너무 ‘세속화’가 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는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사도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수 박에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사람입니다.
진리의 길을 갑니다. 복음의 길을 갑니다. 좁은 길을 갑니다.
세상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람들로부터, 핍박을 않받을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생활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세상사람들과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세상사람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한국의 크리스찬은, 너무 세속화가 되어서,
교회가 세상의 흉내를 내고,
크리스찬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생각하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동기화가 되어서,
사랑의 수고가, 믿음의 역사가, 소망의 인내가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금요일날..불타는 금요일...한 주간 잘 마무리 했으니...내가 나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
맛집에 찾아가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고,
내가 나를 기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금요일 저녁에, 성령의 불타는 금요일이 되어,
성령충만으로 금요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별해 주시기 않겠습니까?
평소에 생활할때도, 성경말씀 봅니다. 기도합니다. 세상사람들과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들이 핍박을 합니다.
꼭 저렇게 까지 교회생활 해야 되나..? 같이 어울리고, 같이 놀면 않되느냐?
한국교회,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박해를 부담스러워 하고, 박해 받는 것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속화가 되어 세상문화속에 어울려 살아갈 때,
박해는 없어지는 것 같았지만...믿음의 그래프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중동, 동남아, 중국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폭팔적으로 많아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한국교회만...조용한 교회, 힘이 꺽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박해를 두려워 해서는 않되겠습니다.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해서는 않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3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말합니다.
“아니 교회 나갔었어요..전혀 몰랐네요”
만약에....주위사람들에게 이런 크리스찬이 있다면, 아마 예수님도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였다고...전혀 몰랐네요”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마치 그물과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져서 끌어 올립니다.
그러면 그물에는 모든 것이 다, 올라옵니다.
꽁치, 고등어도 올라 옵니다. 쓸모 없는 노무라 입깃 해파리도 올라 옵니다.
요즈음 지구온난화로, 우리나라 바다에, 노무라..이름도 일본 이름입니다.
오무라 입깃 해파리가...어장을 망치고, 물고기를 다 죽이고 있다고 하지요..
그 물속에 꽁치, 고등어는 소중하게 모아 드립니다. 하지만 쓸데 없는 노무라 해파리를 다시 던지면, 또 바다를 망치니까..칼로 쓱쓱~~ 그어서 바다에 던저 버린다고 하지요..
그 말씀이 마태복음 13장 48절 말씀입니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영적 추수를 하셨습니다.
구원의 그물을 던저서, 물고기들이 많이 구원의 그물에 들어오도록 허락 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보면, 그 그물을 끌어 올려, 나누시는 과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들은 추수할 그릇에 담습니다.
하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는 그물밖으로, 나가도록 하십니다.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는 칭찬받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알곡 창고에 보아 드리십니다.
하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는 “믿음의 역사가 요즘도 있습니까?” 발견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랑의 수고는 필요 없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게 하십니다.
“소망의 인내는 하지 않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알곡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불러주신 줄로 믿습니다.
귀한사명 감당할 때,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은, 복음의 열매를 맺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핍박 가운데에서 모범되고 칭찬받는 교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나에게만 주신 신령한 은혜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나에게만 주신 응답이 있습니다. 나에게만 주신 말씀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빙긋빙긋 웃으며 기쁨이 넘칠수 밖게 없습니다.
오늘날도 알곡성도는,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다.
바로 이 기쁨, 이 믿음으로, 오늘 이시대에,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구별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