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장 25절 39절 십자가를 향하여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없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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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 가십니다.
예루살렘성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이합니다.
이때에 모습을, 요한복음 12:13 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임금님을 환영할 때,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실 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크게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일주일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이 되겠습니다.
1. 나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상황은, 대혼란, 대혼돈의 시간 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에 찾아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라 하면, 구경꾼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 “어떤 일이 일어나고있는가?” 예루살렘성에 백성들이 몰려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서 공회에서 심판하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장본인 들입니다.
또한 로마군병들도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명령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사형을 집행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는, 다른 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도 있었습니다.
25절 에는 말씀합니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제 3시라 함은, 오늘 시간으로는 오전 9시가 되겠습니다.
즉, 금요일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까.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구경하러 몰려 나온 사람이 봅니다.
십자가 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로마군병들도 십자가를 바라 봅니다.
예수님께서 못박혀 계신 십자가는 하나인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다르게~ 모두 다른 생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먼저, 지나가는 자들은,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29절 30절에 말씀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지나가는 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반대와 부정을 의미하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머리를 절래절래 흔든다. 라고 하면, 부정하고, 부인하고, 반대하는 뜻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제스츄어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 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또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 보았습니다.
31절에 말씀합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희롱은 ‘놀이희, 희롱할 농’입니다. 국어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림’이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던 행악자는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았습니까? 32절에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그렇습니다. 이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머리를 흔들며 바라보았습니다. 실없는 말과 행동으로 놀리며, 바라보았습니다.
나쁜 말로 모욕을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려 봅니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십자가를 바라 보시겠습니까?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지금 나는, 오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또 다른 시야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시간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훨씬 전에~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환상으로, 신령한 영적 체험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보고,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리가 창에 찔림은, 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상한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갖죄를 지시고, 사형으로 죽음의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려, 채찍에 맞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십자가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나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내가 누리게된 평화와 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믿는 성도들을 핍박하였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메섹 언덕에서 환상을 보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열심히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게 못박힌, 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 십자가는 사실 내가 못박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거룩하지 못한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나를 살게하여 주셔서, 살고 있는 것이니,
내가 사는 것은, 이제 내가 아니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고백할 때, 지금까지 십자가 앞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이제부터가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즉,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지금까지와 같이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성자 예수님을 믿는자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십자가 앞에서, 사도바울은 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게 못박힌, 내가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제부터는 육체 가운데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자로 바뀌게된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러는 그 십자가를 볼때에, 고개를 흔들며 바라봅니다.
또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희롱을 합니다.
십자가는 필요없고, 십자가는 없어져야 하고, 요즘시대에 십자가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고, 또박또박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오늘날도, 그 십자가를 볼때에, 이사야 선지자처럼 깨닫고, 사도바울처럼 깨닫고,
그래서,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나는 어떤자로써,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믿는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볼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십자가는 성소의 휘장을 찢어지게 하였습니다.
34절 상반절에는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라고 말씀 합니다.
그리고 37절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라고 말씀 합니다.
제9시는 지금 시간으로는, 오후 3시가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오후 3시에 숨지게 되십니다.
그 사이에, 동반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온땅에 어둠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33절에는 말씀합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즉 오전 12시부터, 오후 3시, 예수님께서 숨지실 때까지 어두움이 임하게 됩니다.
오전 12시라 함은, 정오 이지요. 해가 제일 높이뜨고, 제일밝게 빛을내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오히려 해가 빛을 잃고, 땅에는 어두움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생때 부분일식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점심때 쯤, 1시간 남짓, 주위가 어두워 마치 초저녁과 같은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3시간동안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신비스러운 현상이 아닐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숨지실 때,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는데, 그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저 둘이 되었습니다.
38절에 말씀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성소의 휘장을 어떻게 만드는지, 율법으로 정하여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38장을 보면,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짰으니, 길이는 스무 규빗이요 너비는 다섯 규빗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크기로 본다면, 길이는 9m, 폭은 2m입니다.
그런데, 당시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율법에 나오는, 각 실을 모두 넣어서 짜면, 두께가 4센치 정도 되는, 두툼한 카페트 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입니다.
제자장이 성전에 들어가서, 유대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제사장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소’입니다.
성소는 어떤 곳입니까? 성전의 제일 앞쪽입니다. 법궤가 있는 장소입니다.
법궤에는 모세가 하나님게 받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 위에서, 아론과 그의 후손 제사장들을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장소라 하여, ‘시은좌’ 라고 불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시은좌’ 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하여, 아무나 함부로 볼수 없도록, ‘휘장’을 걸어 놓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시은좌’ 이기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규정 하였습니다.
1년에 딱 한번만, 대제사장이 성소의 휘장을 지나, 법궤앞에 들어갈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성소의 휘장을 지나, 법궤앞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대, 그 성소의 휘장은 찢어져, 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갔던 제사장들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였을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저, 법궤가 훤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시은좌가 저렇게 생겼구나.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성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시은좌--법궤가, 훤히 보이는데. , 우리가, 저~ 시은좌를 함무로 보아도 괜찮은 것인가?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19절 20절에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지금까지는~ 시은좌를 함부로 볼수도, 만질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길을,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는~, 하나님과 성도사이를 가로막는, 휘장이 없습니다.
법궤--시은좌 위에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이 감추지 아니하고, 온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위에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 이시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오마 약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김포상도교회도, 다시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깨어서, 오늘도 활짝 열린 휘장넘어로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드리며,
오늘도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휘장사이의 은혜의 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기뻐하며,
다시오실 예수님을 예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이 은혜로 살아가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하나님, 우리를 한량없이 사랑하시사,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또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있는, 새 길을 열어 주셨사오니,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기뻐하고, 힘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그 자리에 찾아가는, 영적순례의 주간으로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