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39절 45절 믿음의 눈 믿음의 열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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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월달을 시작하는 첫째 주일입니다. 12월달에 들어서서 그런지 날씨도 많이 쌀쌀하여 진것 같습니다.
12월달은 한해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달이지요. 우리 김포상도교회의 믿음의 식구들은, 차분하며, 알차고, 의미있게 올 한해를 잘 마무리 하는 12월 달로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은, 한해를 차분히 마무리하자는 의미에서 ‘나의 눈 속을 들여다 봅시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나의 눈은 건강 합니까? 시력은 어떻습니까?
더 나가서 나의 믿음의 눈은 건강 합니까? 나의 믿음의 눈의 시력은 어떠 합니까?
오늘 본문 42절에는 이렇게 말씀 합니다. “형제여 나로, 너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눈을 스스로 볼수 없습니다. 나의 눈으로는 다른 사람을 보고,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시력이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봅니다. ‘주름살이 좀 생기셨네요’~ 다른 사람의 얼굴에 나 있는 주름살을 보고 말해 줍니다.
더욱 시력이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자세히 봅니다. ‘눈이 참 맑은것 같습니다.’
“저 처럼 눈관리를 잘 못하면, 눈다래끼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시력이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끌 까지 보게 됩니다. ‘눈이 찝찝한데, 저의 눈 좀 봐 주세요’ “네~ 그러지요. 눈 속에 티끌이 들어가 있네요. 눈숙에 띠끌을 빼 내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눈 속에 띠끌을 빼내 드릴까요? ”
뿐만 아니라, 얼굴에 무엇이 뭍었습니다. 제가 딲아 드릴까요?
단추를 잠구지 않았네요. 제가 단추를 잠궈 드릴까요?
사람은 누구나 나의 눈으로 세상을 살피며, ‘관찰자’로 살아갑니다.
더욱 지혜가 출중하고,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세상 모든 일에 ‘관찰자’로 살아갑니다.
아니, 세상에 모든 일에 ‘관찰자’가 아니라 ‘판단자’‘심판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저러면 않되는데, 저 사람은 저게 문제입니다. 저걸 고치면 참 좋을 텐데~’
‘우리사회는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사회는 이걸 고치면, 참 좋을 텐데~’
정말, 믿음이 출중하고, 믿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믿음의 ‘관찰자’로 살아갑니다.
아니, 믿음에 ‘관찰자’가 아니라 믿음의 ‘판단자’‘심판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저 그리스도인은 저러면 않되는데, 저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저게 문제입니다. 저 그리스도인은 저걸 고처야, 예수님 앞에서 축복받고,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마음에 지적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 입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 42절 상반절에는 말씀하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또, 그 앞에 있는 41절에는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나의 눈으로 나를 볼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면, 나의 눈으로 나를 볼수 있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나의 머리를 빚으면, 훨씬 더 단정해 보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나의 옷을 맞추어 입고, 화장을 하면, 훨씬 단정해 보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고, 머리를 단정히 빚고, 옷을 맞추어 입고, 화장을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에 나를 비추어 볼 때, 마침내 성경말씀이 비친 나의 모습을 내가 볼수 있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나를 비추어 보면서, 그리스도인은 신실하고 겸손하고 바른 믿음으로 나를 단장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41절,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날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맹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여,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맹인을 붙잡아서 갖은 말로 괴롭힙니다.
“너는 안식에 고침을 받았는게, 이것이 맞다고 생각 하느냐?”
“너를 고친 예수님을 너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눈뜬 맹인이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시면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남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인 더 힐란 합니다. “맹인으로 살았던 죄인이,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맹인이 눈을 떳으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더우기 안식일에 눈을 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 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눈은, ‘시력’이 문제가 아니라, ‘시야’가 빼딱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시야가 삐뚤어 질 때, 눈뜬 맹인을 향하여, 왜~ 안식일에 눈을 떳냐고 힐난을 하고, 눈뜬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이 말슴을 듣고, 참지를 않습니다. “그럼 우리가, 맹인 이라는 이야기 입니까?”
이 교만한 바리새인의 반문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우리 사회를 보면, 시력이 좋은 분들이, 너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천리안’ ‘독심술’ '심통력‘을 가졌는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게 문제입니다.’
‘저 사람은 저게 문제입니다.’
너무나 시력이 좋은 분들을 향하여, 볼건 보고, 않볼건 않보아야 나의 정신건강에 좋다는, 권면을 해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령한 시력의 은사를 받아서, 노쌍 지옥을 내려다 보고, 악한 사탄과 악한 귀신을 잘~ 볼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겠습니까?
“어~ 저 사람 뒤에, 귀신이 따라 다니고 있네요. 허이구..저 사람은 큰일 났습니다”
“어~ 저 밑에 지옥을 보이는데, 나쁜 짓한 사람이, 유황불에서 울부짓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어~ 당신에 죄가 나에게는 다 보입니다. 시커먼 죄~, 거무티티한 죄~, 죄가 많이 붙어 있네요”
보이는게, 그저 귀신이고, 사탄이고, 지옥이고, 죄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반대로, 어떤 그리스도인은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노회에도 맹인교회가 있습니다. 삼성교회 인데, 맹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는 서민택 목사님도 당연히 맹인입니다.
서민택 목사님은 모교회 되는 상도교회의, 찬양대 지휘자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력이 없어지면 맹인이 되었습니다.
서민택 목사님은 찬양대 지휘를 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마음을 잡고 신학대학에 입학을 하여, 졸업을 한후 안수를 받고, 맹인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자, 맹인교회에 그리스도인은 성도들 모두가,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옆에 집사님, 머리를 빗었는지, 파자마를 입고 왔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보이는게 없으니, “아무개 집사님은~ 헤어스타일이 문제.”라고 지적 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게 없으니, “아무개 집사님은 앉은 자세가 왜 저러냐”고 지적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말소리만 듣고,.. “집사님 오셨네요.~ 권사님 오셨네요.~”
찬송할 때 우렁차게 찬송만 하면, 그게 제일 칭찬받는 집사님이요, 자동적으로 은혜로운 예배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시력이 얼마나 좋으냐? 가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 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 보느냐? 아니면 세상의 재물과 열락과 높힘받는 것을, 바라 보느냐?
예수님을 바라 보느냐? 아니면 시력이 너무너무 좋아서 세상에 모든 죄악만 바라보느냐?
예수님을 바라 보느냐? 또한 옆에 있는 사람의 눈 속에 티끌까지 속속들이 바라보느냐?
바라보는것은 자신의 능력이로되, 그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은혜받는 사람, 믿음이 좋아지고, 축복의 자리--감사의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나 잘 보는데, 그것로 인하여, 은혜가 사라지고, 믿음이 떨어지고, 축복의 자리에서 멀어지고, 감사의 자리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길을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옛날에 어떤 장군에게 아끼는 말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총을 가지고 싸우고, 미사일, 전투기, 인공위성, 첨단 기술로 싸우지요.
하지만, 옛날에는 말을 타고 칼과 창을 들고 싸웠습니다.
장군에게는 말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름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적토마’하루에 천리를 달리니까 장군에게 너무너무 요긴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군이 자신의 말을, 애지중지 아낍니다.
하루는 이 장군이 술을 먹고,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말이 얼마나 똑똑한지, 우리 장군을 술을 먹고 기생집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술을 먹고 정신을 잃었으니, 내가 기생집에 장군을 대려가야 되겠다~. 그래서 말이 기절한 장군을 태운채고 기생집에 갔습니다.
기생들이 나와서 ‘단골 손님이, 또 오셨네요’ 장군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 장군이 깜짝 놀라서 굳을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술을 빠지고, 기생집을 드나들었으면, 말이 알아서 자동적 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는가? 이렇게 살면 앞으로 어떻게 훌륭한 장군이 될 수 있는가? ” 그래서 아끼는 자신의 말을 목을 베어 버리고, 다는 술을 먹지 않고, 기생집은 처다보지도 않고, 열심히 무예를 연마하여, 그 후에 훌륭한 장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동적 습관은 바꾸기가 힘이 듭니다. 평소의 타성, 익숙한 행동은 바꾸기가 힘이 듭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그 습관, 타성, 행동이 나에게 유익하지 않을 때 그것을 깨닫고, 힘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유익한 습관, 좋은 행동, 좋은 생활로 바꿀 때,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실패하는 사람은,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고, 끊는데 실패할 때, 실패하는 사람이 되어 집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습관, 타성, 행동이 나의 구원에 유익한지? 않한지? 믿음의 눈으로,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습관과, 타성과, 행동이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의 구원의 길에 유익하면 취하고, 유익하지 않으면 버리며,~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온전히~ 구원의 길을 완주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당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이정표, 기착지가 있습니다.
4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시력이 문제가 아니라, 시야가 문제인 사람은, 보는 방향에 왜곡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밀하게 관찰을 하되, 나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은 ‘패스’하고, 다른이의 눈속에 있는 티끌을 열심히 바라보게 됩니다.
또, 사람은 눈으로 바라보는 곳을 향하여, 걸어가고 힘쓰게 됩니다. 그럴 때, 그 바라보는데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공부를 열심히 바라보면 공부의 열매를 맺습니다. 기술을 열심히 바라보면 기술의 열매를 맺습니다. 손님을 열심히 바라보면 손님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나의 눈에 들보는 보지않고 다른이의 눈에 띠끌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 나의 눈의 들보를 때는 열매는 못맺고, 다른이의 눈에 띠끌을 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게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즉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슨 열매를 맺었는냐?로 그 나무는 판단을 받게 됩니다.
“나는 다른 이의 눈에 있는 띠끌을 뺐습니다.”~
“나는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뺐습니다.”~
전에는 그랬지만, 올해는 더 유난히, 경황이 없고, 정신이 없었던, 한해인 것 같습니다.
우환에서 코로나가 발병하였습니다.~
인도에서 변이가 생겼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생겼습니다.
정말 쉴틈이 없이 정신이 없이 달려온 한해인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1:19,20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만약,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쌓이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흥미진진 합니다. 이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려 집니다.~” 그렇게 남의 일 보듯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일로 생각하고, 근심하고 걱정할 것입니다.
또, 게중에는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파수를 보는 사람은 어떻게 봉화도 띄우지 않아서, 준비할 틈도 없이 예루살렘이 에워 쌓이게 합니까?
변방에 군사들은 어디가고, 준비할 틈도 없이 예루살렘이 에워쌓이게 합니까?”
만약, 예루사렘이 군대에 에워쌓이는 것을 보게 된다면, 대혼란, 큰 불평, 낙담, 절망, 정말~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볼때, 그리스도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리스인도 같이 혼란하고 불평, 낙담, 절망, 정신없이, 경황없이 보내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똑같은 것을 보지만, 그 가운데에도, 목적과 목표와 내가 가는 길을 잊어버려서는 않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길 입니까? 구원의 길 이지요. 나의 영혼의 천국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르므로, 차분하게 인내로, 나의 영혼을 얻도록,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는 눈도, 시야도 당연히 세상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차분하게, 인내하며,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들뜰 필요도 없습니다.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을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동쪽문은 괜찮습니까? 서쪽문은 괜찬습니가?~ 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이 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 아닐까요? 그저 차분하게 인내하며, 차곡차곡 믿음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십니까? 그 열매로 그 나무를 봐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 헌신의 열매, 전도의 열매, 기도의 열매, 예배의 열매, 봉사의 열매, 찬송의 열매...
어떤 사람은 구구절절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제가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어서 열매맺을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 제가 얼마나 바빴는지 모르시지요. 뉴스 볼 때 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옆에 사람들 볼때마다 그 사람눈에 들어있는 띠끌을, 일일이 찾아서, 가르쳐 주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고 바쁜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틈이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1:19 에는 말씀합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말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바라 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바람이 불고, 똑같이 비가 올 때, 그 바람과 비에... 과수원에 있는 모든 무화과 나무들이 똑깥이, 무화과 열매가 우수수~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비에도 떨어지지 않고 달려서, 열매맺은 무화가 열매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바람과 비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있는 무화과 열매를 발견할때, 더 귀하게 여기고, 더 소중하게 알곡창고에 모아 드리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게서 귀하게 보시는 좋은 열매맺는 무화과 나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의 시야가 좋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귀하게 나를 바라보시는, 좋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 나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한해를 마무리를 12월을 시작하며, 차분하며, 알차고, 의미있게 올 한해를 잘 마무리 하는 12월 달로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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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한해를 은혜가운데 잘 보내고, 이제 한해를 마무리 하는 12월달을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시야로 바라보며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귀하게 나를 바라보시는, 좋을 열매를 맺는 12월 첫째주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