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37절 44절 노아의 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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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깨어있어야 한다’ 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동격서’ 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친다.’ 뜻이지요. 지혜가 있는 장수는 동쪽에 소리를 내어 적군에 관심이 동쪽에 있게 하고, 반대쪽 서쪽에서 적군을 쳐서 상대편을 꼼짝 못하게 합니다.
어리섞은 장수는 동쪽에서 소리가 나니까 동쪽에만 관심을 두다가 낭폐를 당합니다.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선선합니다. 선선한 날씨만 생각하는 사람은, 여름의 열대야가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이제는 살것 같다고 좋아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제 여름 다~가고 가을이 왔구나. 추수때가 왔구나.하고 계절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 ”
어떤 분이 상심이 되어 질문 합니다. “목사님, 요즈음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 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은 탈레반에게 순식간에 무너지고, 코로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마음이 붕~뜨고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동쪽에서 소리가 나고, 먹구름이 가득~하다고, 동쪽에 귀를 쫑긋하고 먹구름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순진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동쪽에서 소리가 날때 서쪽을 살피고, 하늘에 먹구름을 볼 때, 시대의 표적을 살피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1. 노아는 때를 살피고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오실까? 그 시간과 날짜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1절에서 30절에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징조를 일일이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때는, 어떠 하였습니까? 노아 때의 사람들은 ‘징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38절 39절에 말씀합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렇습니다. 노아때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 화창한 가을날씨 같은 좋은 날씨 속에서, 노아는 열심히 방주를 만듭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이라면, 노아가 왜 방주를 만들까?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 계시는것 같은데, 나도 믿음으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였을 텐데...
노아가 만드는 ‘방주’를 보면서도, 노아때의 사람들은 ‘방주’를 징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징조를 징조로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데만~ 관심을 가지며, 어느날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의 이러한 행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방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라~고 하셔서,
오늘날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의 방주’,‘구원의 방주’--바로 ‘교회’를 열심히 세우고, 열심히 만들고, 주님오실 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방주’, ‘구원의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복음의 방주’,‘구원의 방주’에 타지않는 사람은 멸망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전도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속히 교회에 나오셔서,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좋은 날씨에, 예수님이 언제 온다고, 그러십니까?”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구원의 방주’를 보면서도, ‘징조’로 여기지 않습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는 얼마나 컸습니까? 하지만 그 방주를 가득 채운것은, 그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짐승들이 그 방주를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의 방주’도 작지가 않습니다. 이 구원의 방주를 이 시대의 많은 영혼들로, 채워야 하겠지만, 오늘날도 방주는 노아의 때와 같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징조가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구원의 방주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구원의 방주’는 더 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0절 41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 때는 너무나 천천히 오는것 같아서, 마치 않오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임함은 너무나 신속하여,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과 같이, 임합니다.
그 때가 올때까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같이 일을 하고~ 맷돌을 갈았습니다. 그런데 번쩍하고 보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데려감을 당하고, 어떤 이는 버려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때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방주를 얼마나 튼튼하고 얼마나 꼼꼼하게 만들도록 하셨는지...그대로 방주를 만든다면, 노아의 8식구로는, 족히 100년은 걸렸을것 같습니다.
아마, 그때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을, 방주 만드는 가족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10년 전에도 방주를 만들고, 지금도 방주를 만들도, 저 방주는 언제 다~ 만드는가? 하면서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에 보면, 홍수예고는 너무나 신속합니다. “7일 후에 홍수가 내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리니, 너는 빨리~ 방주에 들어 가거라~.”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노아 가족이 한사람도 않보입니다. 다~ 방주에 들어 갔습니다.
다들 노아의 가족들 어디로 갔나?~ 하였더니, 곧 비가 폭포수 같이 쏟아지며, 순식간에 물천지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아프카니스탄의 우리나라 대사관 직원이 피신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고 하지요.~ 우리나라 외무부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장관님 죄송합니다. 지금 연락이 와서 탈출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급하게-- 가방 하나만 챙겨서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미군 헬리콥터를 타는데, “가로세로 30센치되는 가방--하나만 들고 타세요.” 그래서 물건은 그냥두고, 가방하나만 급하게 들고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하실 때는, 꼼꼼하게~ 집안에 모든 물건 다~챙기고, 내가 아끼는 것 다~ 챙겨서, 이사짐 다 싸고 난 다음, 연락하여 이제 됬습니다. 데려가셔도 됩니다.하여 들림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하여도, 그것과 같이 남게 된다면, 그것이 큰일이지요,
모든 것은 뒤로 하고, 아무리 급하게 부름을 받아도, 내 영혼이 올라 가면, 그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노아 때 사람들은, 징조를 징조로 보지 않았습니다.
준비할 것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지금이라고는 절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럴때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 까지, 징조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또한 그 때가 지금인지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아프리카 캐냐의 쇼핑몰에서 테러가 난적이 있습니다.
캐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아닙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를 애썼고, 지금 우리나라 선교사들도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캐냐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캐냐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니까... 이슬람이 물밀듯 캐냐에 들어 옵니다.
그러면서 ‘보코하람’이라는 이슬람단체가 캐냐의 쇼핑몰을 테러하여, 사람들을 모두 인질로 잡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너는 모슬램이냐? 코란을 아느냐? 모하멧의 엄마가 누구냐?”
이 질문에 대답을 하면 살려주고,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입니다.
복음이 사라진 자리, 복음의 없어진 뒤에, 일어난, 캐냐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밭에 버려둠을 당한 사람, 맷돌을 갈다가 버려둠을 당한 여자가 맞이하게 될 현실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되돌릴수 없고, 무를수 없고, 다시 돌아갈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나고 난 다음 보니까 홍수여서, 홍수이전으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지나고 난 다음 보니까 멸망이어서, 멸망이전으로 돌아갈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때, 그 다음은 무를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 노아는 방주를 향하여 살았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창세기 6장 8절 9절에는 노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의 족보를 살펴 보면, 노아의 8대조 할아버지가, 아담이 되겠습니다.
노아의 할아버지는, '므두셀라' 입니다.
노아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분은,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있기-- 5년전에, 노아의 아버지--‘라멕’이 돌아갑니다.
즉 홍수가 나던 해에는, ‘노아’와 ‘모드셀라’만 남게 됩니다.
왜 ‘남게’ 되었다는 표현을 쓰느냐? 하면, ‘노아의 족보’ 때문입니다.
첫사람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살인자--죄의 아들이 됩니다. 아벨이 죽고 난 다음, 아담은 ‘셋’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의 족보는, 불신앙의 아들 가인의 후손과, 믿음의 아들 셋의 후손으로 나뉘어 지게 됩니다.
노아는 바로, 믿음의 아들, 셋의 후손~ 입니다.
자~ 아담은 후손들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단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대로, 나는 죽을 것이다.”
노아의 할아버지, 무드셀라가 243살때에, 아담이 죽게 됩니다.
태어나지 않은자--하나님께 지음을 받은자--아담이, 죽었던 것입니다.
자~ 그 충격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대단~하였겠습니까? 첫사람,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지음을 받은 아담 할아버지가 죽다니...그럼 이제 우리도 모두 죽게 되는 것인가?
아담이 죽고, 57년이 지난 어느날, 무드셀라의 아버지 ‘에녹’이, 하늘로 ‘데려감’을 받습니다.
아마도, 무드셀라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담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죽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버지 에녹은 오히려 죽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죄의 결과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들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에녹’이, ‘무드셀라’의 이름을 지을 때, 그냥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트’ 라는 말은 ‘보낸다’는 뜻입니다. ‘셀라’는 ‘끝, 심판’ 이라는 뜻입니다.
또, 무드셀라 합쳐서 읽으면, ‘창을 던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창을 들고 파수를 보고, 전쟁이 나면 마을을 대표하여 창을 잡고 싸우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창을 던지는 자가, 파수 보다가 졸면, 그 마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끝나는 것입니다.
또 창을 던지는 자가, 대표로 싸움에 나가서 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마을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므두셀라’는 셋의 후손 중 ‘창을 던지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아버지 에녹이 들림을 받고 55년후, 그러니까 므두셀라 나이 355세때 ‘셋’이 죽습니다.
무드셀라가 453살 때는 에노스가, 548세때는 게난이, 603살 에는 증조 할아버지 마할랄렐이, 그리고 무드셀라가 735세 때는 할아버지 야렛이 죽습니다.
시간이 흘러 홍수가 나기 5년전에는, 노아의 아버지--즉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이, 므드셀라 964세때,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을 비롯하여, 아담의 족보에서 믿음의 아들 셋의 계보의 장자들은, 므두셀라와 노아만 남기고 모두 죽게 됩니다.
아마도, 므두셀라와 노아는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창 던지는 자,’ 므두셀라 마져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문앞에 다가오는것은... 않을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가서, 너와 네 가족이 들어갈 방주를 만들고, 심판을 면하고, 생명을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세기 7장을 보면, 노아 600세 되던해 2월 10일에, 하나님께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당연히 무드셀라는 그해에, 969세를 일기로 죽습니다.
아마도, 이때가 가장 암울하고, 착찹하고, 가슴이 떨리는 시기기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해의 첫달이 시작이 되었지만, 첫달이, 첫달이 아닙니다. 방주가 완성이 된 것이, 기쁨이겠습니까? 므두셀라는 죽는것이, 가족만의 슬픔이겠습니까?
노아는 그해 2월 10일에--정신없이, 가족들을 이끌고, 방주로 들어갔고--심판은 말씀 그대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징조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에녹이 들림을 받고, 무드셀라의 이름이 범상치가 않습니다. 거의 1천년 가까이, 계속하여 힌트가 나갔습니다.
거기다가 아담족보 가운데, 믿음의 계보에 있는, 장자들이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직접,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까지 받습니다.
이쯤 되면, 힌트도,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징조를, 겹겹이 보여 주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와 노아의 족보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 징조들를 보며,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살아 갔습니다.
직접적으로, 에녹은 심판에서 구원받는 성도의 예표가 되었고, 무드셀라는 심판의 파수꾼이 되었으며, 노아는 심판의 증인이요, 심판에서 구원받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가정을 배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알려주어도--노아때 사람들은, 이 징조들을, 모두 외면하고, 멸망을 향하여 달려 갔으며,
반대로 노아의 가정은, 할아버지--들의 믿음과 준비아래, 구원받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 25절에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3: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예수님께는, 우리가 삼갈수 있도록, 모든일을--징조와 비유로, ‘미리’ 말씀하여 주시지만,
오늘날도, 그 모든 말씀을 들을때에, 징조를 징조로 여기지 않고,
준비할 것을 준비하지 않으며
그때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것인냥~ 천년 후에도 오실까말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동쪽에 소리난다고 동쪽에 귀를 귀울이고, 세상에 구름을 볼 때, 날씨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길을 가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43절 4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늘 말씀을 정리 합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준비하고 생각하며, 깨어있어
에녹과, 무드셀라와, 특별히 노아의 가정같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살펴주시는 가정이 되며~
장차 주님오실 때에도, 모두~ 들림받는 복된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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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구원의 방주에 불러 주시기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오늘날-- 징조를 바라보며, 깨어 준비하며, 구원의 방주를 지으며, ,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사오니,
주님오실 때, 데려감을 받아, 들림을 받는, 구원의 성도들이 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세상은 징조로 가득한 줄로 아오니, 눈과 귀를 닫고, 태만과 나태함으로, 믿음의 잠을 자지 않게 하시고
항상 노아의 가정과 같이, 의롭고 거룩하게,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가정들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