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장 26절 32절 익숙함을 버리고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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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유를 잘 보내셨습니까?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들을 만날 때 마다, 가족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족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믿음은 분명, 개인 구원입니다. 나, 스스로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여정을 완성하고, 큰복의 사람이 세워지는 것은, 한사람의 노력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에게는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큰복의 사람입니다. 모든 믿는자의,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혼자, 단번에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냐?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의 간절한 뒷받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잘 알려지지 않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믿음의 여정’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데라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서 24장 2절에는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말씀합니다.
데라는 고향이 편하고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익숙함을 버리고, 편한함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나는 데라처럼, 믿음의 발전을 위하여, 익숙함을 버리고 있습니까?
1. 순례자는 익숙함을 버리고, 믿음으로 출발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치는 유목민입니다.
유목민은 가축을 기르기 위하여, 계속 옮겨 다니는 사람입니다.
가축은 생명입니다. 먹을 것을 공급해 주고, 입을 것을 공급해 줍니다.
유목민은 자기를 기준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기르는 가축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가축이 먹는 풀이 없어지면, 아무리 그곳이 익숙하고 편안해도, 가축을 위하여 풀이 많은 곳으로 출발합니다.
유목민은 자기가 익숙하고 편안해야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축이 풀을 많이 먹고 잘자라야, 잘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유목민은 생활하기 위하여, 익숙함 버리는 사람들 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데라, 또한 그러 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가 살던 고향은, 우르 라는 땅이었습니다.
우르는 모든 것이 익숙하고 편안 합니다.
애써 무엇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상에게 절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우상앞에서 푸닥거리를 하고,...
우르의 모든 생활은 우상을 중심으로 생활합니다.
그럴 때, 데라는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요, 성령님의 강권하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딱 꼬집어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사람이 만든 돌과 신상에게, 오히려 사람이 매여서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마음에 큰 도전이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선택하시고, 찾아오실 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 오십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를 만나실때에, 불가운데, 바람 가운데, 만나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세미한 음성 가운데 만나 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 양심과 마음과 생각 속에 찾아오셔서,
나를 깨우치시고, 나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고, 듣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생활속에서 익숙함과 타성에 젖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꽉~~닫아버리면, 그 음성을 들을수 없습니다.
혹시나 하나님께서, 오늘아침에 이렇게 하라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믿음의 기대를 가지고, 마음문을 활짝열고, 믿음의 귀를 활짝 열고......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성령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해라~~ 기도해라~~
하나님의 전에 나아 와라~~
성경을 읽어 보아라~~ 거기에 응답을 기록해 놓았다. 성경을 읽어 보아라~~
자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세미한 음성 가운데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고 순종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신령한 믿음의 사람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나와, 믿음의 눈을 열고, 믿음의 귀를 열 때,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데라는 셈의 후손입니다. 아담의 이야기를 알고, 노아의 이야기를 알고, 바벨탑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셈의 후손으로,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삶인가? 괴로워 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릴 때...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기 위하여, 익숙한 고향땅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기로, 결단할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읽어 보니까... 데라의 이런 믿음의 결단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믿음의 결단을 하니까..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술술 풀리고, 만사 형통으로 진행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데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고난과 믿음의 투쟁’이었습니다.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입니다.
그런데 우르에서 나오기도 전에, 먼저 하란이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슬픔 입니까?
믿음을 위하여 출발하려고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형통하게 일이 생겨야 할텐데...
반대입니다. 오히려 고난이 생기고, 믿음의 투쟁을 해야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큰 일을 할 때는, 사탄이 훼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40일 금식기도 하니까, 사탄이 찾아와서 시험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난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믿음의 좋은일, 믿음의 큰 일이 있으면, 사탄이 더 잘 압니다.
아무게 성도가 하나님께 큰복을 받으면, 아이구 배아파라...큰복을 못받도록, 훼방을 해야 되겠다.
이것이 사탄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지옥에 들어갈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던 자기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땅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으로 올라가니까... 어떻게든지 막아 보려고, 훼방을 하고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믿음의 길을 갈 때, 악한 것들이 훼방하는 일이 나타나면, 오히려 반대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하나님께서 나에게 큰복을 주시려고 하니까 사탄이 배아픈고 보다...
그리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며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데라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들 하란은 죽엇지만, 다시 힘을 차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하여, 믿음으로 우르를 출발 하였습니다.
출발할 때, 죽은 하란의 가족들을 까지 모두 데리고 나옵니다. 하란의 아들 룻과 하란의 딸 밀가... 다 데리고 나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과 나홀도 데리고 나옵니다.
데라는, 자신의 모든 가족을 다 데리고, 우르를 출발 하였던 것입니다.
자 데라의 결단, 얼마나 대단합니다.
만약, 데라가 우르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고, 믿음에 병이들어, 주저 앉았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르에서 그대로 우상을 섬기며 생활 했다면,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족 전체를 데리고, 우르를 출발한 데라의 믿음은, 작은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에는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데라의 마음속에 역사하시고 인도하셨듯이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 똑같이 역사하시고, 똑같이 인도하고 계십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길로 가라~~”
“가족이 모두, 구원의 길로 나아가자”
“내가, 너를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비해 놓았다”
믿음의 귀를 활짝 열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큰복의 길로,... 우리가족을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 나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까?
지금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앞두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4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그다음 프에르 토리코(2만9천달러), 스페인(2만7천달러) 쿠웨이트(2만6천달러)입니다.
우리나라가 계획대로만 되면, 올해말고 내년 연말에는, 3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잘하면 이탈리아까지도 근소한 차이로 앞지르지 않을까? iMF 국제통화기금에서 예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할수 있습니다만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을 해주는 기준이, 3만달러 라고 하지요.
UN에는 200 여개의 나라가 있다고 하는데, 3만달러가 넘은 나라는, 그 중에 18개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국민소득이 1만달러도 않되던 후진국에서, 중진국을 거쳐, 2만달러도 아니고, 3만달러...진입하는 것은, 역사상 우리나라가 처음 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어달리기를, 생각을 해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세대에 걸쳐서, 어려움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습니다.
일제 식민지에, 6.25전쟁에, 외환위기에, 오늘날은 북핵위기.....매 시대 마다 살얼음판을 걷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걸어갈 때, 스페인도 제치고, 이탈리아도 제치고, 나중에는 영국도 제치고, 프랑스 일본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할 때가, 분명히 올것으로 믿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데라의 결단을, 아브라함이 이어받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복을 주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 2절에 유명한 말씀이지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자 그러데, 떠나 올때는 데라가, 가족전체를 데리고 출발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아브라함 가정만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중간에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라가 우르는 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하란’이란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목표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중간에 하란이란 마을을 만나니까..데라가 더 가지 않고, 하란에서 멈추어, 거류하게 됩니다.
‘거류하다’라는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세틀드’ 안정적으로 정착하다는 뜻의 단어를 사용사였습니다.
즉 데라는, 출발은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간에서 멈추어 서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하란’이란 동네를 만나니까, 내 맘에 듭니다. 나에게 익숙하고 편합니다.
믿음이..... 기준이 아니고, 내가 기준이 될 때,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멈추게 서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경계해야 할 것이, 내가 주인 되어, 익숙함, 편안함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입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읽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는 잘 출발합니다. 하지만 레위기만 가도, 도대체 내용이 어디에서 어떻게 되는지 어렵습니다.
전도서에 가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아이구 이번에 통독도 틀렷구나... 그리고는... 헛되이 중간에 그만 두어 버립니다.
그러면 정말 헛될수 밖게 없습니다.
끝까지 가야 통독이 되는 것이지, 중간에 멈추어 버리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 되어서 날씨도 선선하고...기도하기 딱 좋구나.. 기도제목을 정하고, 기도를 열심히 해 보아야 겠다.. 그러면서 금요기도회를 한달쯤 하다보면, 꼭 금요일날 약속이 생깁니다.
한번만 건너뛰지...그러다가는 중간에서 멈추어 서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생활, 구역생활, 선교회 생활, 직분생활...
익숙함, 편한함을 기준삼아서 믿음의 길을 가면, ‘데라’처럼 중간에 멈추어 서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멈추어 서니까, 아들 나홀도 멈추어 섭니다. 가족이 다 멈추어 섭니다.
아브라함만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멈추어 서지 않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열심히 갈때에,
멈추어 선 사람들은 모두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아브라함만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큰복의 주인공이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출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목적지, 도착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믿음은,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롯유다는 중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믿음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동역자로 불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데마는 중간에 세상이 좋다고, 믿음도 버리고, 사명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제자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바울의 동역자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여정이 그렇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알아차리고, 믿음의 결단을 하고 우르를 출발하는 것은,
너무너무 좋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하란에서 멈추어 설 때... 믿음의 결심을 하고, 계획을 하고, 결단을 한 것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데라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어 선, 바로 그 자리 하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 나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히 하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도 아들도, 약속에 땅에 도착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9:62 에는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어디까지 왔을까? 뒤를 돌아보고,
이쯤 하면 되지 않을까? 중간에 멈추어 서면,
하나님 나라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 갑시다.”
한해에 적용을 해보면, 봄에 출발하면, 여름을 거처, 가을은 도착하는 때라고 할수 있습니다.
가을에 멈추어 서지 않고, 꾸준히 달려가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중간에 멈추어 서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완주할 때, 응답이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나의 믿음은, 중간에 길을 잃어 버리지는 않았습나까?
나의 믿음은 마지막 까지,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까?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항상 귀를 활짝열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가서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