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장 8절 11절 대답하는 믿음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
1월달은 믿음으로 출발하는 달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고, 믿음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쫓아서, 출발하여야 하겠습니다.
철학에는 ‘주형’과 ‘질료’라고 하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주형은 틀입니다. 질료는 그 속에 담기는 내용물 입니다.
즉, 동그란 컵에 물이 담기면, 물은 동그랗게 됩니다. 네모난 컵에 물을 담으면 물은 네모나게 변합니다.
주형이 옛생각, 옛 마음, 옛사람이면, 새해를 담을 때, 새해는 옛 마음, 옛사람이 되어 집니다.
그래서 주형을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의 생각, 믿음의 마음, 믿음의 사람으로 새롭게 바뀌어 져야 합니다.
그럴 때, 새 주형에 맡게 담긴... 새해도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가 그대로 살아가면, 지금까지 살아온 야베스의 모습그대로, 앞으로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형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야베스가 새롭게 야곱의 말씨, 야곱의 행동, 야곱을 닮을 때, 그 안에 내용도 야곱처럼 바뀌게 됩니다.
야베스는 야곱의 살아가고, 야곱처럼 복을 받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외형적인 변화, 외식적인 변화가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서 중언부언 기도하고, 거리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사람에게 상을 받기 위하여, 사람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형이 바뀐것이 아니라, 바뀐것 같이 색칠만 하였지, 그 틀은 옛사람 그대로였던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명을 감당하고
밥을 먹을때에도, 물을 마실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새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자원하는 믿음’이 되겠습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자, 원할 원, 스스로 원하는 능동적인 믿음이 되어야 된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무엘’이 되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와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던 훌륭한 ‘사명자’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어린나이에, 일찍이 성전에서 직분을 감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3장의, 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 라고 말씀 합니다.
‘아이’ ‘어린이’라고 한다면, 초등학생 정도되는 시기를 ‘어린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사무엘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성전에서 직분을 감당하며, ‘사명의 두단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단계는 사명의 ‘외적 부르심’이 되겠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제사장이 임명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받은사명은 성전안에, 등잔대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명이었습니다.
성막안에 들어가면, 정면에는 향단이 있습니다. 향단 오른쪽에는 진설병이 있습니다. 왼쪽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31절에는 성막안에 등잔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등잔은 전체적으로 살구꽃 형상 이며, 일곱가지 형상으로,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황금-살구꽃-일곱촛대 끝에는 등불을 켜는데, 문제는 24시간 꺼뜨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엘리제사장은 어린이 사무엘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자, 사무엘이 볼때에, 이 사명을 어떻게 생각할수 있습니까?
“사무엘아, 내가 너에게 성전등불을 24시간 꺼뜨리지 않는 사명을 준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직통으로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또, 사무엘이 볼때에, 24시간 촛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린아이로써는, 다~ 알고 고개를 끄득일 수 없습니다.
불은 꺼지면, 다시 붙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보다는 밥도 먹여야 합니다. 어린이로써 친구들 하고, 밖에 나가서 놀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런고로 어린이로써는,
24시간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은혜롭고, 축복인지.... 모두 이해하고, 열심히 감당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 나는 나의 직분과 사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감당하고 있으십니까?
‘사명의 외적 부르심’, 마치 엘리제사장에게서 사무엘이 촛불을 지키는 사명을 받았던것 처럼,
2021년 우리는 각자 부서와 직분에 대하여, 임명을 받았습니다.
이 임명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감당하는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과 감사가 있으십니까?
성경을 보면, 사무엘은 놀랍게도, 그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줄로 알고, 자원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감당을 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3장 3절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즉 사무엘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등불이 꺼지는지 않꺼지는지, 등불의 기름이 넉넉한지 않한지 살피려고,
아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안에서, 밤을 꼬박 세우며, 성전안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 사무엘의 이 책임감, 이 열심, 이 사명감...과연 믿음이 적다 할수 있겠습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꺼지면 꺼지고 나중에 야단 맞으면 되지, 내가 그까지 촛불 때문에 잠도 못자고, 놀지도 못하고 ~
어린이 로써는.. 그럴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어린이가 아니라, ‘사명자’로써 그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에게서 사명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성물을 지키는 거룩한 사명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나의 일처럼 감당 하였던 것입니다.
자 그랬더니 사무엘은, 두번째 단계, ‘사명의 내적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성전에 누워서 등장불을 지키고 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께서는, 등잔불 지키는 사명이 아니라, 더~ 큰, 선지자의 사명을 맡기시려고, 어린사무엘을 불러 주셨습니다.
성도는, 외적 부르심에 응답할 때, 내적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외적 부르심에 응답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맡겨진 사명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실함과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명의 내적 부르심’으로, 사명자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내가 받은 사명과 직분은, 절대로 작게 생각하고 하찮게 생각하여서는 않되겠습니다.
어린사무엘이, 촛불이 꺼지나 않꺼지나 살피는 사명을 잘 감당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음성으로 불러 주셨는데,
내가 받은 직분, 서리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 목사... 얼마나 귀한 직분입니까?
내가 맡은 부서, 부장, 차장, 실행위원, 얼마나 귀한 사명입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예복을 입고, 예배위원으로 봉사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면, 예배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 반대로 그사람을 귀하게 여시기기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배위원만 귀한 것입니까? 저는 교회난로의 기름을 채울 때 마다, 항상 사무엘의 심정으로 교회난로 기름을 살핍니다.
혹시나 예배 드리는 도중에 교회난로가 꺼지면, 등불이 꺼지는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생각하며, ‘교회난로 기름 게이지’를 살펴보고, 기름을 넣습니다.
반주도 마찬가지 이고, 강단꽃도 마찬가지 이고, 예배를 위한 모든 것이, 다~ 똑같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심정으로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찾아 오셨던것 같이,
오늘날도 큰 은혜로 나에게,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대답하기를 기다 리십니다.
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때에, 어린이 사무엘은, 아직 성경공부가 부족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생활속에서 반복되는 어떤일을 만나고, 그 일속에 성경에 있는 것과 같은 교훈이 발견이 되고,
또한 기도중에 성경말씀을 통하여 큰 감동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아이사무엘이 그러하였습니다. 어린사무엘이 외적사명을 잘 감당할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사무엘을 부르시는데, 사무엘은 그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신 것인지~ 알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착각을 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 갑니다.
사무엘상 3장 5절에 보면, 어린 사무엘이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니까 엘리제사장이 말합니다.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돌아가 누우라 하는지라”
그런데 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다시~ 엘리제사장에게 찾아 갑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제사장이 또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가서, 누우라”
이러기를 세 번이나 반복 합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대답하기 전까지, 절대로 일방적으로, 사무엘에게 사명을 맡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하고, 세 번째 쯤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엘리제사장 한테 갈것 없다. 내가 직접 부른 것이니, 앞으로는 내가 맡기는 사명을 감당하여라”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무엘에게 떠~ 맡기지 않으십니다.
어린이라도, 자기 입으로, 하나님께 대답할 때 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번이나 똑~같은 일이 반복될 때, 엘리제사장은 그때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가르쳐 줍니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를 때에도, 일방적으로 모세를 불러다 쓰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순종할때까지 몇 번을 부르십니다. 떨기나무 불꽃속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시면서, 순종하기를 기다 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일방적으로 불러서 쓰지 않습니다. 깊은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여, 베드로가 깨닫고,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고백할때
예수님께서는 “이제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불러 주십니다.
만약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속에 음성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고 돌아서고~
베드로가 깊은데 그물을 던지지 않고, 예수님 앞에 무릎꿇지 않고 돌아섰다면, 과연 민족의 지도자, 복음의 사명자가 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에 대답하기 까지 기다리시며, 부르심에 대답하는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네 번째 하나님께서 부르실때에, 사무엘이 엘리제사장에게 배운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을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어린이라도 이 대답을 할때에, 하나님께서 그 대답을 들으시고, 그 후에... 사무엘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주시고, 선지자의 능력을 내려 주십니다.
11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어린사무엘은 이 ‘사명의 내적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선지자로 임명을 받고,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알려주실때, 그대로 전달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사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요,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시듯,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 번, 네 번은 계속하여 나를 불러 주십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대답하지 않으면,--
“나의 부름에 대답하는 이는, 누가 있느냐?” 그럴 때, 다른사람이 대답하면, 대답하는 다른사람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6:8 에 보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성전을 드나들던 사람이, 이사야 한명 뿐이었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성전을 드나들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예배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상을 받기 위하여, 사람앞에서 예배드리고, 사람에게 보이도록 기도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사무엘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자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럴 때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이사야가 그 음성을 듣을 때, 얼른 대답을 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명자는,직분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에게 사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 하겠나이다.
시편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나는 않원하는데, 억지로 주위에서 목사를 시켜서, 마지목해 목사 해주고, 있습니다.~” 혹시 그런 사명자가 있다면, 그 사명자는~ 계속하여 남탓하는 사명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도 원하지 않았고, 대답도 한일이 없을 텐데, 사명의 자리에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명을 감당 하였다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그 사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옳을데로 돌아오게하여, 영원토록 별과 같이 빛나는 사명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외적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적 부르심에 겸손하게 자원하여, 사모하는 심정으로 대답할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명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며, 큰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어린사무엘은 성전 등잔불을 지키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어린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할때,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김포상도교회 믿음의 식구들은, 나를 부르시는 온유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아멘으로, 화답하여~
복음의 사명자로, 귀하게 쓰임받으며 살아가는, 올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
========================
하나님, 오늘도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에 불러 주시고, 예배의 자리에 앉게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각자 맡은자리에서 사명붙잡고 봉사하며,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고 있사오니,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뜻하심을 가지고, 나를 부르실 때, 그 음성을 깨닫고, “내가 여기있나이다.”겸손하게 대답하여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부족하지만 쓰임받아, 구속의 큰~영광 나타내는데 쓰임받으며 생활하는,
은혜의 올한해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