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28절 37절 본향을 향한 여정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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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달을 시작 하였는데 벌써 마무리하는 넷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7월달은 새마음으로 새롭게 다시 출발하자는 의미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속사람이 새로워져서, 새롭게 출발하여야 합니다.
구속의 역사는 죄악과 세상사람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공 이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엑스트라입니다.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예수님이 주인공이시고, 그리스도인은 주연급 엑스트라고,
죄악과 불신앙의 사람들은 부질없는 역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맡겨주신 역할을 잘 하면, 그냥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연급 엑스트라가 됩니다.
나의 가정과, 나의 삶의 자리를, 또한 나의 부서와 교회가 잘되도록, 주연급 엑스트라는
분위기를 살리고, 큰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최종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하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목표가 어디인가? 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올라간 산은, 성경학자들이 ‘변화산’이라는 별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갔더니, 예수님의 보습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29절 하반절에는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 정상에서는, 예수님이 본래의 모습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용모가, 성자 하나님의 본 모습으로 변화가 됩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시던 옷도, 성자 하나님이 입으시는 본 모습으로 변화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의 본 모습으로 변화 되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납니다.
자 이모습, 얼마나 거룩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다.
만약 이 모습을 세상사람들이 본다면, 당장에 무릎꿇고 고개 숙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모습을 세상에 왕들이 본다면, 당장에 무릎꿇고 고개 숙이고, 자신의 왕관을 예수님께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다면, 지금 예수님을 수행하는 제자들이 생각할 때, 이것 보다가 더, 신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본모습을 세상사람들이 모르다보니, 제자들이 그동안 받은 수고로움은 보통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시비를 겁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을 짭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들도 제자들 알기를, 우습게 알고~, 제자들도 많은 설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본모습, 이 모습만 세상사람들이 알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았지.. 우리는 그 예수님을 수행하는 12제자들이야~ 보통사람이 아니야~”
그러면서 가슴펴고, 어깨에 힘주고, 당당하게 다닐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자 하나님의 본모습을 보고,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신나고 기쁜데~
자, 그런데 뭐가 바쁜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바쁘게 사라지려고 합니다.
33절 상반절에 “두사람이 떠날 때에”
순간, 베드로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예수님이 바로 성자 하나님 이십니다.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예수님이 바로 성자 하나님 이십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면, 더 없이 좋은, 최고의 그림이 되는데, 그~ 모세와 베드로가 떠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해줄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나?
예수님이 다시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다시바뀌면 어떻게 되나? ... 베드로의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횡설수설, 예수님께 계획을 말씀드립니다.
33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런데,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은 다시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바뀌셔서, 산 밑으로 내려 가십니다.
제자들은 황망하게 예수님 따라서, 산 밑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은 목표와 목적지가, 변화산--산 정상이 아니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산에 정상에 서려고, 변화산에 올라 가신것이 아닙니다.
28절 하반절에는 말씀합니다. “기도 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변화산에 올라가신 목적은, 기도하려, 변화산에 오르셨 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때에도, 예수님의 목적은 변함이 없습니다.
31절 하반절에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즉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기도하실때에도~,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지시는 ‘대속의 사명’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그사명을 생각하시고, 그 사명에 집중 하십니다.
그리하기에, 예수님은 변화산에 계속~계시지 않습니다. 다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려고, 변화산에서-->세상으로 내려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변화산 정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대속의 사명’이 목표요 목적지 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기 위하여, 기도하러 변화산에 올라가셨고,
그 길을 가시기 위하여, 기도하신 후에는 다시 변화산에서 내려오기를,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산에 오르려고 하는 것입니까?
“산--정상에 서기 위해서 산에 오릅니다 !!, 저는 꼭~ 산 정상에 서고야 말겠습니다.”
산--상은 정점입니다. 최고로 높은자리 입니다.
그 자리에 서면, 사람들이 올려다 봅니다. 그 자리에 서면, 세상을 내려다 봅니다.
나의 능력을 보여주고, 나의 실력을 보여주고, 나의 성공을 보여주고~
산 정상은, 나의 본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자리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산정상을 목표로 세우고, 산정상을 목적지로 정하고...정상을 향하여 정점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1996년, ‘에베레스트 등산 사고’의 실제 생존자인 산악기자 ‘존 크라 카우어’의 실화를 바탕으로, ‘에베레스트’ 라는 영화가 만들어 졌습니다.
비슷한 영화로는 우리나라의 ‘엄홍길 대장’과 ‘고 박무태 대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히말리야’ 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내용은 비슷합니다. 명성을 얻기 위하여, 성업적으로 광고를 하기 위하여, 다양한 목표로,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려고, 사람들이 열을 올립니다.
정신없이~, 온힘을 다하여~, 죽기살기로~, 에베레레스트 정상에 도착을 합니다.
정상에 서서, 얼싸안고 사진을 찍습니다.
여기가 에베레스트 정상인가?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내려오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상에서 너무 지체하여, 시간에 쫓깁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힘이 빠져서 그런지...
발을 헛딧고~ 구르고~ 사고가 연발합니다.
저산소 증으로, 대원이 쓰러집니다. 크래바스 낭떠러지로 대원이 굴러 버립니다.
결국에는 어두움과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에베레스트 산에서, 낙오자와 부상자와 많은사상자를 내는, 참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산을 올라가고, 산정상에 서는 것은, 산행의 완성이 아니요, 일부분입니다. 산--정상에서 안전하게 내려와서, 집에 도착할 때, 그 산행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산행의 최종적인 목적은, 산-정상에 서는것 뿐만 아니라, 산에 올라갔다가, 정상에 도착한 다음, 다시 안전하게 내려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 까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정점에 선 사람들에게, 왜 ‘승자의 저주’가 찾아오고,
정점에 섰던 사람들이, 왜 정점에서 떠밀려, 떨어지듯 불행하게, 밑바닥을 향하여 곤두박칠 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성경을 보면, 노아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목표’요 ‘목적지’였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은.... 누가 더 호화롭게 먹고 마시는가? 누가 더 부티나게 시집가고 장가가는가?
노아시대 사람들은 그것으로, 경쟁 하고, 부러워하고, 자랑을 삼으며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38절 에는 말씀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자~ 정점을 향하여 올가가는 것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다음은 계획에, 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자랑하고 부러워하고 경쟁하다가, 죄악과 함께, 물속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표와 목적지는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산 정상까지만 목표로 잡고, 목적지로 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본향에 도착하는 부분까지도, 계획이 잘 세워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2. 어떻게 정상에 잘 오르고, 본향에 잘 도착할수 있습니까?
요즈음 북한에서는 우리나라 걸그룹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레드 벨벳’이 인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레드 벨벳’ 북한식으로 바꾸어서 부른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보았더니 “붉은 융단 떼거리”
레드--‘붉다’, 벨벳은 ‘융단’...그룹은 ‘떼거리’..
“붉은 융단 떼거리, 노래가 북한에서는 유행입 네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유행’ 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다고, 그것이 ‘진리’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많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코로나’가 좋은 것은 아니지요.
‘죄악’이 많이 유행하니까, ‘죄악’이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변화산 정상에 도착하여, 베드로는 산정상에, 초막셋을 짓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산정상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 순종하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본향에 들어가는 것 까지, 온전한 인생여정을, 완성할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는 목표가 분명하셨습니다.
조금전에 보았습니다만, 28절 하반절에 “기도 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사람은 누구나, 높이 올라간 사람, 많이 성공한 사람, 큰 성과를 이룬 사람을, 부러워 할때가 있습니다.
“그렇게나 되었어? 그렇게 하였어?”
그런데, 정상에서 그냥~ 곤두박칠 쳐서, 창피란 창피는 다~ 당하고,
차라리 그 정상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알려지지라도 않았을텐데...
정상에서 갑자기 건강이 않좋아서, 남좋은 일만 해주고, 끝나 버리기도 합니다.
~오히려 더 불쌍하고, 더 불행하고, 더 않좋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명예롭고 덕스럽게 다시 잘 내려와서~
잘 마무리를 해야, 비로서 그 모든 여정의 성공, 성과를 판가름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루었다는 자신감,
아직도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다섯달란트~면 다섯달란트, 두달란트~면 두달란트를 잘 남겨서, 주인과 셈하고, 완전히 마무리가 되어서, 칭찬받는데 까지, 마무리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지금 나아가는 ‘목표 의식’, ‘방향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의 영광이 아닙니다.
나의 만족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걸어가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이루었을 때, 거기에서 나오는, ‘나의 만족’을 얻으려고, 복음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갔습니다.
그럴 때, 매사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방향성’와 ‘목표의식’이 분명하여,
욕심과 자기만족이 아니라, 감사와 찬송으로, 의의면류관을 받을 때 까지, 생활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건강한 ‘본향 의식’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내가 본향에 가야하는 존재임 알았기에, 노아는 노아의 시대에,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불신앙이 관영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상속으로 받을 가나안땅을 향하여 갈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넓은길로 간다고, 넓은길이 좋은길이 아닙니다.
본향에 도착하는 그 길이, 진리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좋은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정상에 오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길이 본향으로 가는 여정이 되어,
본향까지 잘 도착하는데까지~ 계획을 세우고,
‘믿음의 목적의식’, ‘건강한 본향의식’으로, 온전한 믿음의 여정을, 완성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고, 기도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향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입니다.
산은, 본향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요 과정입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멈추면 소용이 없습니다.
정상을 넘어서, 본향에 도착할 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무슨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찬송과 기도로, 복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서
조금 더 완성되는 ‘본향을 향한 여정’으로 생활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본향을 향하여 구원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미 이루엇다고, 자신감으로 넘치지 않게 하시고,
다른 이들을 보면서, 아쉬움으로 멈추어 서지 않게 하시고,
본향을 향하여, 매일매일, 겸손함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범사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활하고
찬송가 기도로, 나의 만족이 아니라, 복음의 사명을 붙잡고 생활하며,
그리하여 본향에서 주님께서 주실, 부름의 상을 소망하며,
한주간도, 더 완성되고, 더 온전하여지는, ‘본향을 향한 여정’을 잘 생활하는, 한주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