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에서 창대로 욥기8장 5절 7절
2013.10.18 18:32:12 조회4347
욥기8장 5절 7절 미약에서 창대로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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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약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속에 들어있는 교훈을 하나씩 둘씩 찾아 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두가지로 읽을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산을 보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이제 얼마 않있으면, 단풍철이 시작됩니다만, 멀리서 산을 보면, 엄청난 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세라고 하지요. 산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장엄한 광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방법은 미시적인 방법입니다. 산이 아니라 숲을 보는 방법입니다.
멀리서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에 가까이 가서, 오히려 산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숲풀을 만나게 됩니다. 각종 아름다운 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이름모를 풀벌레를 만나게 됩니다.
나 만이 아는, 졸졸 흐르는 옹달샘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통독을 하면, 역사를 꿰뚫고 지나가는, 하나님의 장엄하신 구원의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왕들이 폐하여 지고, 나라들이 일어섯다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변함이 없으시지요.
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산속에 아예 들어가 버리듯이, 성경말씀 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그 속에 한절 한절, 송이꿀 같이 달고
또 나만이 발견하는 은혜의 진리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잘 붙잡고, 균형있게 말씀을 볼때에,
누구보다도, 풍성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내것으로 만들어 낼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늘쌍 꿈꾸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리스도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을 외웁니다.
그 만큼 사모하는 말씀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삶, 이삭, 야곱...
모두 혈혈단신으로 시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을 향하여, 세상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출발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창대하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고,
가나안 땅의 조상이 되고,
12지파의 조상이 되고,
그래거 우리는 누구나 이 말씀을 사모합니다. “나도 창대하게 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이말씀 한절만 볼것이 아니라, 앞 뒤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말씀의 초점은 ‘미약함’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7절 말씀은 물론 창대하게 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축복에 말씀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강조점은 오히려 ‘미약함’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고난 받으면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은 고난받는 사람 ‘욥’이 받은 말씀이 되겠습니다.
고난받는 사람 ‘욥’을 향하여, 그의 친구‘빌닷’이 전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욥은 고난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난 이라고 하면, 잘 살아가던 사람이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욥이 그러하였습니다.
욥은 잘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또한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욥을 인정하고 또 존경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욥을 가르켜 ‘동방의 의인’ 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그러는데, 욥은 법 없이 살 정도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의인이라고 할 정도로
스스로 정의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 의인이 받게 되는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길르던 가축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욥기 1장 3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자녀들도 다 훌륭합니다. 같은장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런데 생일잔치를 하는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둑들과 강도들이 와서, 그리고 집이 무너져서,
가축들을 몽땅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자녀들이 몽땅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욥 빈털터리 노숙자가 되었는데, 자신도 병에 걸려서, 병속에서 목숨만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이란, 간단하게 설명할수 있는 부분이, 분명 아닙니다.
또 이 시간 어떻게 고난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이시간에는 8장에서 욥의 친구 빌닷을 통하여, 고난의 한 부분이라도 살펴 보려고 합니다.
빌닷은 고난 받는 사람을 위로하거나, 또 고난의 아픔을 나누기 보다는,
이미 벌어진 고난이니, 이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고난받는사람, 위로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위로받는 다고 마음은 진정이 되겠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이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병원에 가면, 상처 난 곳에 소독약을 바릅니다.
“아퍼요..아퍼요.”. 그래도 아프다고 가만히 놓아두면 덧 나지요.
그러니까 더 아퍼도 치료하기 위하여 소독약을 바릅니다.
심지어는 상처난 부분을 실로 꿰메어 줍니다.
아니 상처가 난 부분에 더 아프게, 바늘과 실로 꿰메어요? 하지만 그래야 상처를 덮어서 치료할수 있기에,
정형외과에 가면, 아프다고 해도 의사선생님이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아프게 하더라도, 치료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은 하고 맙니다.
빌닷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위로만 하고, 있겠습니까? 고난은 이미 생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아프더라도 그 고난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빌닷은, 욥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고난 받고 있으면,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리고 괴롭다고 말만 할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간구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청결하고 정직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봐주시고, 처소를 평안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결국 고난이란 것이 생기는 것은, 내 주위에 ‘죄’의 권세가 세어지고, ‘의의’권세가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왜 내 주위에 죄의 권세가 세어지게 되었는가? 돌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지금까지 나의 주위를 한번 생각해보면,
나는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주위에 환경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나는 눈꼽만큼도 잘못이 없는데, 모두.... 다른사람이 잘못해서 어려운 고난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만약 그때 내가 쪼금만,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지금 이런 어려움은 당하지는 않을텐데...
만약 그때 내가 쪼금만, 다른 길로 갔더라면, 지금 나는 상당히 좋게 되었을수 있을텐데...
정말 퍼센트로 따지자만, 아쉬움이 남는 과거가, 너무너무 많은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고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유없는 고난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 조금만 성질을 죽이고 그대로 있었더라도, 지금은 부자가 되었을 텐데...
정말 고난의 대부분은 나의 탓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만 않했더라도, 지금 일이 이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빌닷이 바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초점은 미약함에 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욥, 너 자꾸 우는 소리 하고, 억울해 하는데...
다 너 때문이야..
하나님이, 이렇게 되도록 하신 것이, 어찌 잘못될수 있겠습니까?
너는 모른다고 하겠지만, 네 자녀들이 너 몰래 죄를 짓고,
그 죄가 다 쌓이고 쌓여, 골마 텨져서, 이렇게 된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4절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그래서 빌닷은, 욥이 받는 고난을 보면서, 이유없다고 억울해 하지말고,
받는 고난,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빨리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원인은 고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때 고약이란 것이 생각이 납니다.
부스럼이 생기고, 발갛게 피부가 가려오면, 아버지가 고약을 붙혀주십니다.
정말 고약하게 생겼습니다.
조금 지나면, 고약을 바른 곳은, 났는것이 아니라, 상처가 덧납니다. 그만 노랗게 고름이 생기고 맙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해서 고름을 빼버리면, 금방 아물고 깨끗하게 되지요.
하지만 반대로 마이싱을 자꾸자꾸 먹다 보면,
요즈음은 작을 병도 오히려 크게 되어, 원인도 모릅니다. 아토피니...각종 병들이 더 많아지고 말았습니다.
아프다, 괴롭다고만 하지말고,
우리는 빌닷의 권면을, 깊이 세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2. 고난받을때는 미약함에서 창대함으로 출발하는 때 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의 특징은 화를 억누를 길이 없어, 분노를 터트릴때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분을 터트린다고 일이 해결이 되면, 한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분을 터트리겠습니다만,
이미 업질러진 일인데, 분을 터트린다고,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37:8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어떤 집사님이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너무나 가슴이 착찹하지요.
이제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지 죽어서 나올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게, 저절로 간절하게 기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 재발 말로 하십세요. 왜 제 배를 째고 그러십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베푸십니다.
정의는 미쉬파트라고 하지요. 판결하시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공의는 체댁 이라고 합니다. 판결의 결과를 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판결하시고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큰 파괴를 행하실때도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람이 잘못할 때, 물로 모든 사람을 멸하시기 까지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를 저지를 때는, 불과 유황불을 내려서, 도시를 뒤 엎기 까지 합니다.
욥이 고난을 받게 되었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징벌에 비교하면, 많이 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에는, 고난을 당할 때, 분노와 억울함을 내려놓고, 자숙함과 회개의 상징으로
굵은 배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분냄과 화냄을 버러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이홍구 전 총리가 그랬다고 하지요. “이만하면 됬네 뭐..”
일은 않되고, 속이 터져도...그냥 마무리 하는 말이었다고 하지요. “이만하면 됬네 뭐..”
화는 화대로 내고,
성질은 성질대로 다 부리고,
그러면서 어떻게 죄의 세력을 멀리하고, 고난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이 더러운 성질,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나에게서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내 이 더러운 고난의 근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깨끗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바꾸어 주십시오.
내 이 더러운 성질 씻어 버리고,
나의 잘못된 인성을 씻어 버리고,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분냄에서 자숙함으로, 고난에서 은혜의 길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에 동양증권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만,
그 회장님은, 망했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아직도 우리보다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아직도 돈이 수십억 있는데,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밤잠을 자겠습니까?
부들부들 떨면서, 지금 밤잠을 못자고 있을 것입니다.
욥은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낙타 약대, 재산이 엄청납니다.
그 많은 것을 다 잃으니까 잠이 오겠습니까?
그런데 깨달았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을 바라볼때..
누구 탓할필요가 없구나...나의 부덕의 소치구나..
그러면서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분냄과 성질과 원망이 다 부질없음을 알고 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럴떼 빌닷이 욥에게 말해 줍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사실 욥은 미약하지 않았습니다. 동방에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다 잃어버리니까 미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구절에는 바로 욥의 지금의 자리...“미약하였으나”
얼마나 심오한 배경이 들어있는 단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약하게 되는 것으로 끝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무슨 말씀입니까?
미약한 자리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미약한 자리는 이제 시작의 자리입니다.
그 시작은 과거의 욕심과 타성과 죄악의에서 벗어난...아기처럼 새롭게된...
고난속에서 다시 태어는 욥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그럴때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창대하다는 것은 전보다 더 잘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전에 욥보다 더 잘된다는 것이지요..
진짜 욥은 나중에 왕창 창대해 지지요.
가난한 사람만이, 미약한 자 만이...축복으로 나아갈수 있다.
미약한 욥이 새롭게 시작하게 될때, 마침내 창대하게 되는 축복을 받을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난 받으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청결히 하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난 속에서 이전에 모든 것은 다 내려 놓고
하나님앞에서 새롭게 바뀌어 지면,
미약한 자리에서 출발하게 되어집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
이 축복의 말씀속에 들어있는 믿음을 능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서 살아가는
창대함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