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2편 1절 12절 희망이 완성되려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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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달을 시작합니다. 2월달은 “찬양으로 희망을 여는달”이라는 주제를 정하였습니다.
나의 생활에는 어떤 희망들이 있습니까?
또한, 희망의 문이, 나에게 열려서, 매일매일 행복하고, 활력 있고, 생활하고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다윗왕의 시편이 되겠습니다.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을 의지하여 한 노래 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영장은 찬양대 지휘자를 뜻합니다. 다윗왕의 시대에는 헤만, 아삽, 여두둔...세명의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다윗왕은 찬양대 지휘자 중, ‘여두둔’의 찬양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하였습니다.
1절에 보니까....“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즉, 다윗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고 노래하였습니다.
1.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풍운아요. 용기 하나로, 자기의 삶을 개척해 갔던 사람입니다.
소년일때는,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용기 하나로 맞서 싸워서 이겼습니다.
청년일때는, 사울왕의 ‘군대의 장’이 되고, 부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롭고 똑똑하니까... 사울왕이 의심을 합니다. “다윗의 꿈이 무엇일까? 이렇게 지혜롭고 똑똑한데...과연 다윗의 꿈이, 군대장관일까? 아니면 혹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울왕은 다윗을 의심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다음부터 한참동안 도망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왕이 죽고 나니까, 다윗은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면, 나의 희망을 가로막던 사울왕이 사라지니까.....모든 문제가 해결되고,....행복의 문의 활짝 열리고, 매일매일 활력이 있고, 매일매일 즐겁게, 살아갈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자신부터 실수를 합니다. 밧세바에게 반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죽입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어떻게 보면 다윗왕이 제일 맘에 들어하던 아들입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지혜도 출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킵니다.
반역의 과정도 보통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가장 아픈 부분을 명분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아버지를~갖은 창피를 주면서,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왕은 결국 압살롬을 죽이면서, 반역을 진압하게 됩니다.
다윗왕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왕은 옹졸하여 자기가 망하는 길로 갔습니다.” 나는 마음이 넓고, 신하를 사랑하는 왕이 되겠습니다. 보란듯이 자랑하고 싶었는데....
조금 지나고 보니까...다윗왕도 사울왕 보다가, 더 낫지 않은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하 장군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는 옹졸한 왕이 되었습니다.
자식도 죽이는, 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자 이쯤하면, 백성이 손가락질 하여도, 다윗이 어떻게 변명을 할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신하들에게....나를 믿고, 한마음 한뜻이 되고, 앞으로 나갑시다. 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소년의 때’부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곁길로 가도, 세상사람들이 다 불의를 쫓아 갈 때도....나만의 정의의 길을 가고, 나만은 바른길을 간다고 말하면서 달려 왔는데...
열심히 오고 보니까, 돌고돌아 다시 제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제자리 보다가 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욕심만 쫓는....옹졸한 왕~, 자식도 부하도 죽이는 '나쁜 왕'~의 자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자~ 다윗왕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다윗왕이 위대하였던 것은,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실수를 덮고, 잘못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9절 10절에 말씀합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다윗왕은 솔직하게, 회개하는 자세가 되었습니다.
“어허....무슨 그런 말씀을, 이게 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입니다.~”
“다~ 깊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니, 사소한 것에 관심 가지지 말고, 불레셋이나 무찌릅시다~”
다윗왕이.... 왜 이렇게 말하고픈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왕은 그러한 유혹을 이기고, 믿음위에 서기 위하여 몸부림을 첬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할 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자신을 죄를 돌아보고, 금식하며 밤마다 울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할 때, 시므이가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져도,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하심일수 있다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사람의 지혜에서 출발하고, 사람의 계획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획이 아무리 좋다고 자동적으로 희망이 빤짝빤짝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혜롭게 살아간다고 자동적으로 행복한 매일매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계획이 좋아도, 돌발상황이 불쑥 나타나 근심의 나날을 보낼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는 지혜롭게 하여도, 돌발상황이 불쑥 나타나 걱정의 나날을 보낼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고 간절한 회개의 자리에 설때에, 비로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희망의 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은,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다윗왕은 나의 능력과, 나의 힘에 의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고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이라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뭔가 하려고 할수 있습니다.
큰 궁궐을 지으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을까?
큰 치적을 세우면, 백성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하지만, 다윗왕은 그런 잔지혜는 내려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이 속하였고,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왕은 겉은 화려하지만 실속이 없었다고 한다면, 다윗왕은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지만, 가장 실속이 있는 왕이 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솔로몬 왕의 지혜는, 표면적인 지혜였다고 한다면, 다윗왕의 지혜는 심층적 지혜, ‘희망과 찬송의 지혜’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왕은 자신의 부족한 것이 드러나고,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때,
자신의 힘과 계획을 의지하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면서,
‘희망과 찬송으로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리스도인은 표면적 지혜가 아니라, 심층직 지혜, 말씀의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계획과 능력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찬송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2. 그렇다면, 다윗왕은 무엇으로... 희망과 찬송을 실현 시켰습니까?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말씀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절에도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왕은 반석이요, 구원이요, 요새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을 맞이할때, 그 상황보다도 더 놀라 날뛰는 요동함이, 오히려 문제해결에 방해가 될때가 있습니다.
그 일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나~ 어쩌면 좋아요 ?” 말이 10배로 걱정을 더 키웁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망했네요~ 어떡해요. 어떡해요 ”
문제도 문제이지만, 문제를 대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정말 문제가 될때가 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 에는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어린아이는 작은 문제도 해결을 못합니다. 마트에 가서 과자를 사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어떤 과자를 사야 할지, 얼마짜리 과자를 사야할지...결정을 못합니다.
나중에는 혼자 결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엄마한테 말합니다. “엄마가 대신 결정해 주세요”
요즈음 어린아이 같이 결정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어른들이 있어서, ‘결정장애’ 라는 말이 유행을 합니다.
어른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더 큰 문제라도 거뜬하게 해결을 합니다.
큰 일이 생겼을 때, 당황하지 않습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차분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여 해결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 믿음이 어른같이 성숙한 사람은, 문제를 만날 때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감당할 시험을 주신줄로 알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실 것을 믿고...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 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요동하지 않고, 넉넉히 감당해 나갈 때...
그 사람은, ‘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절과 6절에, 다윗왕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하나님 입니까?
나의 반석되시고, 나의 구원되시고, 나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반석처럼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자신의 요동함을 멈추기로 하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바라보고, 철저한 죄인으로써 하나님을 붙잡기로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반석’이란 별칭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가 있습니다.
본명은 ‘바요나 시몬’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라 하리라~고, 별칭을 지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번역하면 ‘반석’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반석처럼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제자 였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왔다갔다하고, 요동을 하는지,.... 변덕이 심합니다.
사람이, 신뢰를 받으려면, 자신의 말을, 자신이 지켜야 하지요. 변덕이 있는 사람은, 신뢰가 떨어집니다.
변덕이 심한 사람은, 큰 사명을 맡기기 불안합니다.
베드로는 말은 선선히~ 호탕하게 잘 하였습니다. 너무 호탕하게 말을 하니까, 책임감이 없어 보입니다.
베드로는 정답을 말합니다. 하지만, 자천타천으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베드로의 말은 70프로는 없다고 거르고, 30프로만 들여야 해~ 그래도, 댓구를..... 못하였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단단히 말씀을 합니다.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바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켤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바로 또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 잡혀가시니까, 제자들이 뿔뿔히 흩어집니다.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서 대제사장의 뜰에, 따라가는 것 까지는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한 여종이, “여기 예수님의 제자가 한명이 있네요?” 하고 가르키니까..
그때부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부인을 하였는지...마태복음 26장 74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즉 예수님을 그냥 모른다고 한것이 아니라, 맹세를 하였습니다.
“내가 이 자리를 빌어서 맹세를 하는데, 나는 예수님을 절대로 모릅니다.~”
맹세 한것 만 아닙니다. 저주를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면, 저주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면...이 자리에서 걸어가다, 앞으로 넘어저도 뒤꼭지가 깨지는 벌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데, 저주를 하면서, 맹세를 하면서, 극구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자 이것이 베드로 입니까? 반석처럼 요동하지 않는것 입니까?
아니지요. 방금 전까지, 말은 너무너무 잘 하였는데, 그러나 자기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서 한, 자신의 그 말은, 곧 없어져 버렸습니다.
오늘 시편 본문 바로 그대로입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더 가벼우리로다”
반석 베드로의 말이 얼마나 가벼운지, 예수님 앞에서,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켤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을 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 말은, 무게가 하나도 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맹세와 저주를 하면서,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왔다갔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이렇게 왔다갔다 요동을 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요동하는 베드로는... 변덕이 생겨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 뵙고도...
갈릴리바다로 돌아가, 다시 그물을 던지며, 어부로--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리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믿음은, 마지막 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처음도 중요합니다. 중간에 과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끝이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완주 할 때 결승테이프를 끊고 금메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발할 때, 1등으로 출발하고, 중간에 1등으로 달려가도, 결승점에 도착을 않하면, 금메달을 받을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처음에는 멋있게 출발하였습니다. 중간에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결승점에 들어갈때는, 은혜롭게 들어가리라..
그래서 이제는 매일매일 찬송하며, 매일매일 하나님만 의지하는.... 철저한 믿음의 생활을 살아 가기로 하였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반석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닮기로 하였습니다.
“나도 반석처럼...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꾸준한 사람, 인내하는 사람, 오래참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결승점에 잘 도착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생활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길이~ 흔들리지 않는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누구도 ‘완성’ 하였다고 할수 없습니다. 결승점은 저~ 멀리에 있습니다.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로 순종하며 끝까지 걸어갈 때...
비로서 ‘희망’은 결승점에서, ‘완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다윗은 인생여정을 통하여 잠잠히 하나님 바라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결승점 까지, 요동하지 않고, 잘 도착하는, 훌륭한 왕으로 높임받게 되었습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요동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로 걸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바라는 큰 소망이, ‘결실’하는 생활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하나님,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 봅니다.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지 다 알수는 없지만,
교만과 오만으로 곁길로 벗어나지 않토록 하시고, 겸손과 신중함으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믿음이 있게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끝까지 믿음으로 완주하여, 소망이 결실하는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