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편 1절 11절 고라의 마스길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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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달을 시작하는 첫째주일입니다. 이제는 더위는 물러가고 가을이 찾아온것 같습니다.
9월달은 ‘신실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달’입니다. 오늘은 시편 42편을 통하여, 신실함으로 풍성하게 살아갔던 ‘고라 자손의 교훈’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신실함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까?
신실은 한문으로 밀을 신, 열매 실입니다. 한글사전으로는 믿음직하고 착실함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믿음직하고 착실하며, 사람들 앞에서 믿음직하고 착실함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다는 구절은 우리에게 잘 와 닫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생각한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너무나 구체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슴은 달리는 동물입니다. 힘차게 자유롭게 달립니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까 광야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디쯤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한참을 달려서 그런지 온 몸에는 땀이 비오듯 합니다. 다리가 후둘후둘 합니다.
자~ 해는 중천에 올라가 뜨겁게, 내려 쬐입니다. 그대로 있으면, 목이말라 죽을수 밖게 없습니다.
사슴은 애타게 물을 찾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있으면, 그 맑은 물을 마시고, 그 새냇물을 따라갈 때, 숲이 있는 곳으로 찾아갈수 있습니다.
만약, 맑은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찾지 못하면, 광야에서 힘이 빠지고 목은 마르고--그대로 있으면, 뜨거운 햇볕으로, 광야에서 죽을수 밖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슴은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할수 밖게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라의 자손은 바로 그 심정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게 될때, 종종 광야같은 세상, 죄악이 관영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갈때가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습니다. 나의 온 몸은 거룩함이 아니라 죄악으로 만신창이입니다. 마음에는 평안이 사라지고, 근심과 외로움이 가득합니다. 삶에는 힘이 빠집니다. 기도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찬송해도 은혜가 없습니다.
자~사탄은 이때를 알고, 죄악의 총공격을 해~ 옵니다. 여러가지 않좋은 일들이 막~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사탄의 총 공격에, 넘어질수 밖게 없습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생명수 되시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아직도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시는, 그 사랑, 그 은혜를 내가 느낄수만 있다면, 그 증거를 붙잡고, 다시 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수 있를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타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하나님의 신령한 인도하심을, 갈급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오늘 시편은, ‘고라자손의 마스길’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즉, 오늘 시편은 그 내용이,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는--‘시편’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고라의 자손은, 어떻게 이런 교훈의 시편을 쓰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26장 10절 11절에는 말씀합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민수기 26장은 두 번째 인구조사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6장 마지막절에는 두번째 인구조사를 해 보니까, ‘여분내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는 설명을 덪붙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출애굽하여, 민수기 1장에서, 첫 번째 인구조사를 하고 광야를 출발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평이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고, 가고 있는데도, 사사건건 불평이 끝이 없습니다.
“목이 마릅니다. 물이 없어서, 목이말라 한걸음도 못 가겠습니다.”~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나게 해서, 마시게 하십니다.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파서 한걸음도 못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만나를 먹게 하여 주십니다.
“만나는 맛이 없습니다. 고기구경을 하지도 못하고, 고기 않주시면 한걸음도 않가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매추라게를 내려서, 매추라기 고기를 먹게하여 주십니다.
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합니까, 하나님께서 급하십니까?... 아쉬운 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출애굽해서 한달만 바짝~속도를 내서 걸으면, 금방~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할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나안 땅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는 안중에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는 갖가지 불평하면서.... 오히려, 이것~ 않주면 않간다고 하는, 황당한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마지막 끝판왕 사건이 ‘고라와 다단, 아비람 사건’이 되겠습니다. 고라가 중심이 되어 다단과 아비람이 합세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바꾸어 주시고, 모세 대신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아론 대신 다른사람으로 대제사장을 삼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눌러 앉아 버립니다.
그 말을 듣고 각 지파, 각 가문의 어른들, 250명이~ “그말이 좋다~"고, "꼭~그렇게 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힙니다.
자~ 과연 고라와 다단, 아비람, 그리고 250명의 각 가문의 어른들...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데--신실하며, 충성되며, 믿음이 깊고, 헌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목표를 망각하고, 다른데 마음이 빠져, 신실함이 흐려지며, 믿음에 병들었다고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날, 하나님께서는 257명의 사람들과 모세와 아론에게 향로를 준비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257명과 모세와 아론이 그 향로를 앞에 두고, 성막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그래서, 향로 하나씩 준비하여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그순간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진영에는 큰~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져,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땅 밑으로 뭍혀서, 몰살을 합니다.
또한 250명의 향로에서는 불이 나와서,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불에 타~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염병이 일어나, 그 말이 맞다고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 일만 4천 7백명이, 죽게 됩니다.
아울러, 이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는 가운데, 민수기 1장에서 처음 인구조사 할 때 계수받은,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 26장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를 할때는~, 처음사람들은 모두 없어지고, 다음세대~ 즉 자녀들이 어른이 되어, 인구조사 계수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행하게도, 고라의 자손들이 죽지 아니하였더라~고, 살아남은--고라의 아들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라의 자손은, 죄인의 자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에게 천대받는 자손인가? 아닙니다.
고라의 자손의 활약은, 그 다음부터,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
역대상 6장 31절-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
======그들이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계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직무를 행하는 자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핫의 자손 중에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 그는 요엘의 아들이요 요엘은 사무엘의 아들이요”
다윗왕이 법궤를 다윗성에 모셔드릴 때,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세웁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찬송하는 찬양대의 시초는, 다윗왕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대에는 세명의 중심인물-- 헤만, 아삽, 에단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인물은 ‘헤만’이 되겠습니다. 설 때, 아삽과 에단은, ‘헤만’ 좌우편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방금읽은 구절에는, 제일먼저, 성전 찬양대 ‘지도자’인 헤만을, 제일먼저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그 헤만이 누구인지, 그 족보를 상세하게 소게 하는데, 그 족보 뒤쪽에는 “고라는 이스할의 아들이요”~라고, 헤만이, 고라의 후손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실함을 갈급하는 자는, 자신의 능력을 모두 사용하여,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라자손의 고민을 곳곳에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너는 고라자손의 후손이 아니냐? 고라자손의 후손이 염치도 없다.~ 고라자손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손이 아니냐?~..
사람들에게 놀림과, 손가락질과 저주의 낙인이 찍힌 후손이, 어떻게 보면, 고라의 자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서도 괴롭히고, 스스로 마음속에서도 나는 고라의 후손이라고, 힘들어 할수 있습니다.
우리도 유사한 경험을 할때가 있습니다. “너는 이러이러 해서, 않될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이러해서 않될것 같습니다.~”
종종 주위에서, 환경적 조건을 들어, 부정적인 프레임을 나에게 씌우는 것을, 경험할때가 있습니다.
또한 나 스스로도 나에게 부정적 조건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프레임을, 나 스스로에게 학습 시킬때가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은, 만약 이런 식으로 해 본다면, 대대로 천민이 되어, 하층민이 되어 살아도, 이상하지 않는것이 고라의 자손들 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고라의 자손은 다윗왕이 법궤를 모셔드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 때, 성전에 법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찬양대를 지도하는, 중요한 직책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복의 근원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지향적인 가치관에 눌려서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된것은, ~ 옛날에 누구 때문이다.~ ~과거에 무엇 때문이다.~
이런 가치관은, 내가 하는 것은 전혀 없고, 그 원인을, 다~ 다른데로 돌려 버립니다.
낙인효과, 주홍글씨라고 하지요. ‘탓’을 하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우냐~ 하면, 그 사람의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탓의 ‘최고봉’은, ‘불교’입니다. 카르마~ 업보는 3생을 관통하는데, 현생의 내가 이런 것은, 전생에 내가 지은 카라마~ 업보 때문이라고 ‘탓’을 해 버리니까....
내가 지금 요모양 요꼴이 된것은, 기억나지도 않고, 알수도 없는, 전생에 너의 탓이다.~고 덮어 씌워서.. 스스로를 탓하며 ‘내 탓이요,~’‘내 탓이요,~’하면서, ‘탓’을 하며 살도록 만드는 것이, 불교의 프레임 입니다.
신명기 7:9 에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분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복은 나를 통하여 시작되고~....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대대손손 천대까지, 나에게 복을 주시고, 인애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라의 후손, 헤만은 나의 조상들이 어떠하고, 나의 과거가 어떠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내가 하나님을 찾기를, 마치 사슴이 시냇물 찾기를 갈급함 같이, 찾을 때,
고라의 후손은 저주받은 후손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의 책임자, 지도자가 되며, 다른사람을 교훈하는 ‘마스길’을 선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고라의 후손은 신실하였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한번 신실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신실하려며, 생각과 가치관이 바꾸어 지지 않으면, 계속하여 신실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42편을 기록하였던, 고라의 후손은 밤낮으로, 신실 하였습니다.
낮에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밤에는 찬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고라의 후손은, 신실함으로 인정받았던 후손들 입니다.
역대하 20장 19절 20절에는 말씀합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여호사밧왕때의 일입니다. 모압과 압몬이 함께, 남유다를 공격합니다. 그 동안 남유다는 설마~ 왜적이 처들어 올까? 하고 나태하게 지내다가, 허를 찔리게 됩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준비를 않했는데, 이제는 싸워도 이길수 없습니다.”~
“모암 압몬이 함께 처들어 왔으니. 이제 우리는 졌습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데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럴 때, 고라 자손들은 “심히~ 큰~ 소리”로, 찬양을 하기 시작 합니다.
찬양을 들으면 힘이 나지요. 찬양을 들으면, 은혜로움 마음이 생기고, 근심의 마음, 괴롭고~ 외로운 마음이 물러 갑니다.
그런데 반대로, 찬양을 하는, 찬양대는 그냥 찬양이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먼저 준비를 해야 합니다. 화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찬양을 할지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 목소리만 높힌다고 좋은 찬양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세상의 음악과 다르게, 찬양을 할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응답을 전달하려면, 찬양하는 찬양대가 먼저 기도로 준비하고, 먼저 믿음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을 전달할 준비가 되어야 있어야 합니다.
고라 자손은, 부정적이고, 믿음이 떨어지고~, 낙심과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남유다 백성들 사이에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과 정성으로 찬양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이 찬양을 듣고, 남유다 백성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사밧 왕도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사받왕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고 전쟁터로 출발하는데, 그 제일 앞에는, 다시 고라자손--찬양대가, 제일 앞장을 섭니다. 어떻게 보면, 고라자손은 남유다가 제일 힘들 때,, 그 때 죽기를 각오하고, 제일 앞장서서, 제일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투기 시작 되었는데, 대승을 하게 됩니다. 모압과 암몬의 군대는 크게 패하여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은 그 승전의 자리를 ‘브라가’골짜기 즉 찬송으로 이겼다 하여. ‘찬송 골짜기’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또 역대상 9장 17-19절 말씀에도 고라자손이 나옵니다.
“문지기는 살룸과 악굽과 달몬과 아히만과 그의 형제들이니 살룸은 그 우두머리라
이 사람들은 전에 왕의 문 동쪽 곧 레위 자손의 진영의 문지기이며===
===고라의 증손 에비아삽의 손자 고레의 아들 살룸과 그의 종족 형제 곧 고라의 자손이 수종 드는 일을 맡아 성막 문들을 지켰으니 그들의 조상들도 여호와의 진영을 맡고 출입문을 지켰으며“
성막을 지키고, 성전의 출입문을 지키는, 성전 문지기 제일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살룸입니다. 그런데 그 살룸은 고라의 후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성막은 제일 중요한 곳입니다. 성전에는 각종 성전기물이 있습니다. 성전 기물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거룩한 기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너무너무 가치가 있습니다. 성전기물은 금으로 만들고, 성전 곳같에는 값비싼 보물들이 있습니다.
자 이러한 성전기물과 보물을 지키는 책임자를 누가 할 것인가? 당연히 고라자손이 적임자다~ 하여, 고라자손의 형제들이 그 일을 하고, 그 중에서 책임자로 ‘살룸’이 세움을 받게 됩니다.
신실하지 않으면, 맡기기가 주저되는 중요한 자리에, 고라자손은 모든 백성들의 신뢰를 받으며,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 13절에서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한 성도에게 직분을 맡겨 주시며, 그 직분을 신실함으로 감당할 때, 천대까지 언약을 지키며, 인애를 베풀며, 동행,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라자손은 교훈의 신편을 기록 하였습니다.
고라는 광야에서 않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손들은 반대로 믿음이 모범되고, 신실하여, 중요한 직분과 사명과 책임을 넉넉히 감당하며 헌신 하였습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으로 살아갈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오시고, 동행하시고, 높혀주시며, 자녀들에게 까지 베풀어 주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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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항상 동행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고라의 자손들은-- 고라를 탓하지 않고, 나라가 힘들 때 제일 앞장서고, 어려운 일은 신실함으로 그 책임을 감당하여,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하는, 시편을 기록 하였사오니...
오늘 우리도, 과거지향적, 환경지향적이 아니라, 오히려 실실한 믿음과 능력으로, 은헤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매일매일 살아갈수 있도록, 범사에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