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 15절 17절 어린이의 믿음을 본받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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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다음주일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린이의 믿음을 본받자’라는 주제를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자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15절 상반절에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성자 예수님께서, 나의 자녀를 만져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자~ 이 마음은 부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간절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부모님들과는 반대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15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제자들은 반대로 생각하였던 같습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 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말씀 전하시는데, 그 앞에 자꾸~ 자기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면,~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아이에게 손을 얹으시고 기도해 주습니다. 그러면 말씀 전하는 것이 그 만큼 지체되고 끊깁니다.
많은 어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께 축복기도 받으려고, 자꾸~ 자기의 아이를 예수님 앞에 세우면...누구는 자식이 없습니까?
그런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체시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것입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제자들 대로 고충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꾸짖고, 못 오도록 금~하지 말고, 용납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현대인은 ‘목표지향적’ 이라 할수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생활을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성취감을 느낌니다. 목표를 달성하면 적절한 보상이 주어 집니다.
그러니까 현대인은 목표에만 몰두하고, 목표가 최고인것 처럼 여깁니다.
반대로, 목표 외에 다른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목표만 필요한가? 아닙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어울리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목표만 최고로 여기다 보니, 그 사실을 간과하고 깨닫지 못할때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는 자동차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자동차를 위하여, 화단은 대폭~ 밀어버리고 주차장을 대폭~ 늘렸습니다.
하지만, 화단에 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만약에, 교회에 꽃이 하나도 없고, 주차장만 있다면, 얼마나 각박하게 느껴지겠습니까?
아마도 100년, 200년이 흘러서, 자율주행--공유 자동차가 일반화 되는 세상이 온다면,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듯이, 자율주행--공유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 입구에서 내리면, 그 자동차는 Ai가 운전해서 다른 곳으로 갑니다.
만약 그런 Ai-자율주행-공유자동차 일반화 되는 세상이 온다면, 교회는 주차장이 줄어들고, 다시 화단이 늘어 날지도 모릅니다.
목표를, 절대불변 요지부동,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변적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일반적인 목표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넉넉한 재물을 모으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당장 1년을 더 살수 있을까? 2년을 더 살수 있을까? 한다면,
일반적인 그 목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인정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넉넉한 재물은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기는 커녕,
당장 건강을 우위하여 치료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목표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평소에 건강이요, 가정의 화목하고, 하나님 앞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제자들은 목표지향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많은 어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많이 모여 있습니다.
자꾸 어린아이들을 앞으로 보내어, 예수님께 축복기도 받는 것은, 어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지체하게 만드는, 목표를 방해하는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반대로 말씀 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지금 코로나로 인하여 어린이들이 교회에 없습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하여 어린이들이 없다고 할수 있겠지만, 현실은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이 자체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추세입니다.
교회에만 어린이들이 줄어드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체인구에서, 어린아이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줄어들고 어른들만~ 있으면, 우리나라가 튼튼한가? 아닙니다.~ 나중에 50년후에는 인구가 반토막, 100년 후에는 반에 반토막, 300년후 400년 후에는---한민족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런데 예수님은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16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깜짝 놀랄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그 말씀의 설명은,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 나는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계시록 끝장 22장에 보면, 천국에 대하여 묘사를 하고 있는데, 천국에는 수정같은 맑은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그 강 주위에는, 먹으면 약이되는 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천국에는 햇빝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서,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 집과 성은, 각종 보석과 금과 은으로 아름답게 지어져 있습니다.
반대로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지옥에 대하여 말씀이 나옵니다.
불과 유황불꽃이, 혀를 날름 거립니다.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죽을수도 없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고통하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게 질문 합니다. “자~ 천국은 이러이러하고, 지옥은 이러이러 한데, 너 천국갈래 지옥갈래..”
어린이는, 열이면 열, 백이면 백...“천국 갈래요.” 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른들 한테 똑같은 이야기와 똑같은 질문을 하면, 대답이 그렇게 단순하고 명쾌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복잡해~ 집니다.
“저기~, 사도 요한은 천국을 확실히 본 것 맞습니까?”
“저기, 예수님은 지옥을 확실히 보신 것 맞습니까?”
뿐만 아니라 조건적 질문을 하는 경우도 발생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수 있습니까? 방법이 너무 어려우면, 천국 가기 곤란한데요~...”
심지어는, 불신앙적 질문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설마 예수 않믿었다고, 지구상에 있는, 예수 않믿는 사람 모두를....설마~ 지옥에 보내겠어요?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끔찍한 지옥을 만드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유보적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바뻐서, 나중에 생각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지금 뭐가 그렇게 바쁘십니까? ”
“네. 스타필드 구경 가기로 했습니다. 목사님 스타필드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시죠?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천국이라도 해도 스타필드 만 할까요?~ ”
노아때는 죄악의 사람의 수가 부족해서, 노아가정 빼고, 땅위에 모든 사람이 다 물로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것이 적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까?
천국에 편의 시설이 부족해서, 나중에~ 천국보다, 당장의~ 스타필드를 사람들이 찾는 것입니까?
목표지향적 현대인은, 목표가 자신의 제일기준이 되고, 그 목표가 자신의 가치관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의 묙표로 판단을 합니다.
기준이 성경말씀이 아니고, 기준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기준은 나의 목표, 나의 가치관이, 기준이 됩니다.
그결과, 하나님께서 아무리 방주를 만들라고 하여도, 만들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방주 만드는 노아의 가정을, 이상한 가정으로 손가락질 합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아무리 말 하여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뱀이 유혹할 때,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뜩이며, 기어코 선악과 따~먹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천국은 이러이러 하고, 지옥은 이러이러 하다고, 수 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고,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생각을 막고, 세상사람들은 기어코 넓은 길로 걸어가기를 힘을 씁니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요한복음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현대인들은, 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답하는 이유는 길어지고 복잡하다 할 지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결과는 단순합니다. 결국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17절에 말씀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았습니다. “좋은 말씀 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셔야지요. “지금은 바뻐서 장에가야 하고, 소를 사서 소를 몰아 보아야 하고, 결혼식이 있어서, 참석해야 되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 나면, 그때 요량 것, 제가 알아서 들어 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가 나의 목표가 되고, 하나님 나라가 나의 가치관, 기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의 믿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듯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8:2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가정에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합니다.
“얘야, 아버지가 오실 때 까지 기다려라”
그러면 어린이는, 아버지가 오실 때 까지, 자신을 낮추고, 당연히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천국잔치’가 준비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말씀 하십니다.
“자~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까지 기다려라”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오실 때 까지, 예수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며,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내가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
예수님 보다 나를 더 앞세워서,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보다가 나를 낮추고, 예수님께서 오실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성도는 하나님 보다가 나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인내하며,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어린이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마태복음 21:15 에 말씀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성전에 예수님이 계실 때, 어린이들은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의미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임금님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하고 개선할 때, 백성들이 기뻐하며 외칩니다. ‘호산나~ 호산나’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은 예수님은 만왕의 왕, 큰 승리를 하신 임금님,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로 고백하며~ 기뻐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 를 외첬습니다.
반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 옆에서 ‘호산나’ 외칠 때 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이들처럼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호산나’ ‘하나님,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복음송가를 부르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서기관 같은 사람은 반대로 노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왜~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까?~
요즘 나의 주변일 일들을 생각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할일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송가 부를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면서,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고, 복음송가 부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일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일상생활속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어린아이 처럼 ‘호산나’ 기뻐하며 감사하는 믿음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어린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마태복음 11:25--27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어린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지혜롭고 세상에 슬기있는 사람은, 그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예수님~, 나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렵니까?
그래서 예수님~. 지금 나의 이 고민은 ‘언제’ 해결해 주시렵니까?”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다음은 술~술~ 풀릴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을 바라볼 때, 꺼꾸로 바라보니까...보이지가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고, 답이 보이지 않고, 나중에는 예수님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 결과, 나의 지혜와 나의 슬기를 등불삼아, 몽학선생이 되어, 나의 마음에 드는길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이 아니라, 곁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는, 정결한 눈이 되어, 온전히 ‘먼저..’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가,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낯추고, 예수님을 기뻐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 봅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으로 낮아져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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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나라에 어린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사오니, 믿음의 어린이들을 특별히 기억하여 주시고, 다음 시대에, 교회를 세워나가는 믿음이 사명자들로 성장할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린아이가 복음의 대할때, 순수성, 순진성, 또 때묻지 않는 그 모습을 닮아서,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순수하며 순진하며 세상의 죄악에 때묻지 않고,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한주간도 온전히 생활하는, 은혜의 한주간으로 인도--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