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0절 12절 사순절에 본받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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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이 시작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의 기간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순절은 한문으로, 넉사, 열흘 순, 마디 절입니다. 영어로는 ‘렌트’ 라고 하지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절 전 40일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사순절기를 지켰습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성도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사순절은 ‘참여하고 본받는’ 절기 라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순절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0절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순절에 성도들은 ‘참여’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10절 상반절에는 말씀합니다.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 하여야 합니다.
고난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좋은 것이 아닌, 나쁜 그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고난도 보통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십자가의 실물을, 우리는 직접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형태와 모양만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살펴 본다면,
십자가의 목적은 로마가 최고로, 흉악한 죄인에게 벌을 주기 위하여 만든, 사형틀 이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때문에 친근하게 그 이미지가 바뀐것이지, 사실은 엄청나게 끔찍한 사형틀인 것 입니다.
조금 더 십자가를 살펴보면, 십자가는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준비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준비의 단계는, 철저한 괴로움의 단계입니다.
먼저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최고로 나쁜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이 판정을 받으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최고로 나쁜 사람으로 대우를 받게 됩니다.
대우를 받는다는 표현을 써서 그렇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최고로 나쁜 사람으로 심판을 받았기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사람들은 그 죄인을 향하여, 갖은 나쁜말로 조롱을 하며, 폭행을 하며 괴로움을 받게 합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는 준비의 단계는, 철저하게 버림받는 단계요, 절망에 떨어지도록 만드는 단례가 하겠습니다.
그럼 십자가에 달려서는 편안이 죽게 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역설적으로, 빨지 죽지 않토록 하는 형틀 이었습니다. 즉, 죄인이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죽으면서, 오래동안 죽음의 갖은 고통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면, 길게는 몇일씩, 몇주씩, 괴로워하며, 서서히 죽게 된다고 합니다.
자~ 이정도만 하여도, 십자가는 너무나 끔찍 합니다.
신명기 21:23 하반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또한,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신명기서를 보면, 나무에 달린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최고로 무서운 십자가 형틀에 달려서, 죽으시고,
더욱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는 자가 되어, ‘저주의 나무’에서 죽으셨던 것입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 최고로 무서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저주를 받은 자가 되어, 죽으신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3 은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하여서 입니다.
우리가 그냥 죄속에서,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되면, 죄인으로 판정받을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죄인으로 심판이 끝나면,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속에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심판을 누가 대신 받겠다고 하여 주신 것입니까? 예수님께 대신, 받겠다고 하여 주시고, 친히 받아 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받아야할 진노와 저주를, 누가 대신 받겠다고 하여 주신 것입까? 예수님께서 대신 받겠다고 하여 주시고, 친히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을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맛집에서 식사할 때, “오늘 점심값은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그러면 괜히 횡재한것 같고,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내야할 점심값은, 대신내어 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아 주시고, 내가 받아야할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아 주셨으니,
횡재도 보통 횡재가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쓸어 내리며 식은 땀을 딱으며, 감사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은, 내가 받아야할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내가 받아야할 저주를 대신 받아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보내는 기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순절 기간은, 본받는 기간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2절 33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방금 읽은 말씀은 일만달란트 빚진자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 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장정 한사람의 하루 품싹을, 한 데나리온 으로 첬습니다.
오늘날로 비교 하자면 일당이 되겠습니다. 한 5만원, 6만원, 전문직종은 10만원 이라고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루 품싹이 6천개가 모이면, 한 달란트가 되는 것입니다. 즉 6천일이 해당하는, ‘품싹’이 되는 것입니다.
6천일이 몇 년인가? 365일로 나누어 보았더니, 대략 16년 하고 반이 되었습니다.
복잡합니다만, 정리를 해보면, 1달란트는 장정 한사람이, 16년 5개월 일하고 받는, 가치에 해당하는 돈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비유를 보면, 탕감받은 돈이, 1만달란트를 라고 하니까,~ 계산해 본다면, 장정 한사람이 16 만 5천년 동안, 한푼도 않쓰고 저축해야 모을수 있는 돈이, 되는 것입니다.
자, 16만 5천년 동안 저축해야 되는 돈을, 탕감받은 사람이, 거꾸로 다른사람에게 100데나리온을 받지 못하였다고, “나는 100데나리온을 절대로 탕감 해줄수 없습니다. 100데나리온을 끝까지 돌려 받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해도해도 너무 한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받을 심판과,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주신, 그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데,...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사랑을 본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을때에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본받는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으로 부터, 말을 배우는 것이지요.
어린아이는 처음에는 알아들을수 없는 옹아리를 합니다. “어 어, 아 아....그러다가 부모님의 말을 따라서 할때에, 옹아리는 변하여, 엄마, 아빠...발음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말씨를,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도 ‘온유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다른이를 위로하고, 자존감을 높혀주고, 그래서 힘을 북돋워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동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후찬양예배때 “복음서의 기적”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처주실 때...
병자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나쁜 병마와 귀신은 꾸짖어 쫓아 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꾸짖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꾸짖어야 하지, 오히려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을 꾸짖으면,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병든 이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꾸짖고, 병든이는 손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한 말과 은혜로운 말을 하고,
내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이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주고~, 그래서 그 사람이 힘을 차리고 일어날 때, 그때 내가 받는 기쁨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서 한, 사람만 받게 되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은 나를 위하여 대신 심판 받으시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사랑의 발걸음을 뒤따라 걸아가는 기간이요,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그 십자가 사랑을 생활속에서 실천하며 생활하는 기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참여하고 본받으며, 살아가면, 그 다음에는...
2.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1절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번에 나누어 드린, 40일 기도표에 보면, 그림이 있습니다.
두 동산이 있는데, 오늘쪽에 동산은 ‘십자가 의 동산’ ‘골로다 동산’ 이 되겠습니다.
가운데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요, 그 옆에 두 십자가는, 이번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따라가는 ‘나의 십자가’ 입니다.
그리고 그림을 보면, 그 옆에는 ‘부활의 동산’이 있습니다.
부활의 동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십자가의 동산에 참여한 사람만이, 부활의 동산에, 갈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에 동산에 서 계신 예수님 옆에, 내가 서는 것이,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사순절 40일 기도를 하실 때, 기도표의 그림에, 부활의 예수님 옆 자리에, 나를 그려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릴때는, 나 뿐만 아니라, 부활의 자리에, 같이 서 있어야 되겠다 싶은 사람도, 같이 그려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부활의 예수님 옆자리에 나 혼자만, 서 있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려 넣으시고,
부활의 예수님 옆자리에, 같이 서있어야 되겠다고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그려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프랭카드가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편안하게 쉬세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 하였습니다. “그곳이 편안할지 않할지, 어떻게 안다고, 편안하게 쉬라 하는가?, 마음속으로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기 쉬운 말로, 혹시 충격받을까봐 좋게 대답해 주자...선의로, 가끔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만, 말씀하시고, 거짓이 없으신 분 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을 하면, 선의로도 거짓말 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모두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궁금한 것이 많은 제자들이, 잠쉬도 쉴틈이 없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저 성전이 좋지요? 저 성전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 요한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은데, 요한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이 지옥에 대하여서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그대로~ 이야기 하여 주십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 49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얼마나 그 곳이 영원한 절망과 어두움의 자리이기에,
한달란트 청지기를 내어 쫗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내어 쫗고~, 예수님을 배척하던 유대인들을 내어 쫗을 때
그들이...한결같이 공통된 반응을 보일 것을, 예수님을 말씀 하여 주십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
슬피우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얼마나 절망이 되면, 이를 부득부득 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이 있느냐? 영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대속과 죄사함과, 아울러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게 되는 천국의 영원한 기쁨과 영생복락은
무엇으로도 표현할수 없는, 은혜와 행복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려”~고 하였습니다.
이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12절에 보면, 부활의 예수님, 그 옆에 서기 위하여,
겸손과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오직 부활을 향하여, 매일매일 달려가는 생활을 산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믿음생활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이만하면 되었다는 ‘교만한 자신감’이 되겠습니다.
세상에는 ‘샴펜인을 일찍 터트렸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세상도 얼마나 변화가 빠르고 큰지 모릅니다. 뉴스를 보니까, 저 뒤쪽에 있던 대만이, 우리나라를 바싹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기간동안, 대만이 얼마나 따라붙었는지, 대만의 TSMC는 벌써 삼성을 뒤집었고,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도, 우리나라를 역전하는 것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신감에 차서, 흡족해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이만~하면 되었고,
축복을, 이만큼~ 받았으면 되었고
은혜를, 이만큼~ 받았으면, 나 만큼, 하나님 앞에서 믿음좋은 사람도 없다. 할 때...
순식간에,......... 다른사람이 더~ 기도하고, 더~ 축복받고, 더~ 은혜 받고,
그래서, 먼저 된 줄 알다가 나중되고, 나중된줄 알고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앞서가는 역사가...
사순절기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사순절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그 여정을 뒤따라가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본받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 옆에, 나도 설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자리에 서기 위하여, 매일매일 믿음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번 사순절기, 나의 기도의 제목을 정하고, 하루하루 믿음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느 해에도 받지못한, 큰~ 응답과 큰~ 축복을 받는,
사순절기로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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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를 사랑하여 주시사, 예수님을 내어 주심으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또 부활의 동산에서 나의 산소망을 위하여, 부활하시니, 참으로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사순절기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나를 향한 절기 인줄로 아오이,
이 사순절기,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고,
이 사순절기, 예수님의 부활의 산 소망을 굳게 붙잡아,
큰 은혜와 신령한 능력을 체험하는, 사순절기로 보낼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