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 11절 20절 나를 사랑 하심으로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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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이 되겠습니다.
어떤 분이, ‘크리스마스’를 세글자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한참 생각했는데, 답은 의외로 쉬웠습니다. ‘성탄절’ 이랍니다.
다같이 ‘메리크리스마스’ 인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라는 말은 영어로, 즐겁다 라는 뜻입니다.
‘크리스마스’ 는 성탄절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성탄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죄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의 소망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에게, 기쁘고 즐거운 날이 아닐수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중요한 지적을 합니다.
사람이 이성적 존재이기만 한다면, ‘합리적 준거’로 살아갈수 밖에 없습니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너무나 바르고, 과학적이고, 진리 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존재 합니다.
내가 배부른 것이 낫습니까? 배고픈 것이 낫습니까?
당연히 배가 부른 것이 낫습니다.
내가 많이 가지는 것이 좋습니까? 내가 적게 가지는 것이 좋습니까?
당연히 많이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이성적 존재라면, 욕심의 본능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게 됩니다.
남보다가, 더 배부르고 싶습니다. 남보다가 더 많이 가지고 싶습니다.
나 보다가 더 배부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 보다가, 내가 더 배 부르고 싶습니다.
나 보다가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그 사람 보다가, 내가 더 많이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보면, 끝없이 배부르고, 끝없이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의 기준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밖게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합리적 기준으로 욕심의 법칙에 의하여서만 살아가는 존재인가? 아닙니다.
사람은 선하고, 착한 것을 압니다.
내가 배가 고푸지만 착하게 살아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적게 가지고 있지만, 선하게 살아야 한다. 고 생각을 합니다.
선한것이 무엇입니까? 착한것이 무엇입니까?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면, 내가 손해볼수도 있습니다. 내가 희생을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손해와 희생을 보더라고,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성으로는 설명이 않됩니다.
그래서 칸트는, 합리성을 넘어서, 선함와 착함과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인간의 ‘순수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순수이성’은 철학적으로는 형이상학의 영역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동물이, 선하게 살려고 하고, 착하게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만이, 선하게 살려고 하고, 착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선한 것이 무엇이고, 착한 것이 무엇인가?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선함과 착함, 진리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명하기가 힘들어도, 누구나 쉽게 알고는 있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악이 무너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너무나 쉽게 이해를 합니다.
세상의 죄악이 무너지고, 선함과 착함과 진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을, 누구나 소망합니다.
아기예수님의 오심으로, 세상의 죄악이 무너지고,
선함과 착함과 진리가 충만하게 되어, 하나님 나라가 튼튼하게 세워질 때,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메리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이라고, 인사하고 화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아기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 나셨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니까, 그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로, 태어 나셨습니다.
‘강보’는 한문으로, 포데기 강, 포데기 보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이불을 포데기 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포데기에 싸옇서, 누일 곳이 마땅찮아서, 구유에 뉘어 졌습니다.
같이 공부를 하였던 동기목사님들 가운데에는, 선교사로 나간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볼리비아에 나간, 최상락 목사님을 선교 후원하고 있습니다만,
그 것 보다가, 더 오지에 들어간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브라질, 인디오 마을에 갔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프리카, 흑인 마을에 갔습니다.
브라질 인디오 마을은, 너무 오지라서, 1년에 2번 정도 바깥 세상과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신대원 다닐때는 공부도 잘하고, 원어성경 점수도 높고해서, 계속 공부를 할줄 알았는데, 인디오 오지 마을에 들어 갔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인디오 들이 보는 성경을 완성하겠다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데 그 곳은, 전기도 없고, 가스도 없고, 자동차, 지하철...당연히 없습니다.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습니다.
냉장고도 없습니다. 세탁기도 없습니다.
아궁이에 불지피고, 강가에 가서 빨래하면서 살아 갑니다.
지난 번에 보았을때가 7년이었으니까, 지금은 벌써 12년이 훌쩍~ 넘었을 같습니다.
자 그런곳에, 복음 전하기 위하여, 20년 동안 들어가서 살라고 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편은 사명감 때문에 들어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같이 살아가야 하는데, 결정을 내리가 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문명의 이기를, 편리하게 누리며, 생활하는 사람으로써
아프리카 오지, 브라질 오지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근... 중국 연변에 가는 것도, 힘들어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성자로써,
천국에서 하늘영광을 버리시고, 이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태어날때에는, 아기가 되어, 포데기에 쌓여, 구유에 누이고,
장성하여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천국은 거룩한 곳입니다. 어두움이 없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이 땅은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불의와 절망으로 가득합니다.
천국 생활하다가, 이 세상, 생활을 하라고 한다면,
불편안 이 세상에서 어떡해 생활을 해요?
거기에다가, 천국에는 영원과 희락과 화평으로 충만합니다.
이 세상은 눈물과, 원망과 슬픔이 교차합니다.
돈을 1억을 준다고 해도, 세상에 가서 살라고 하면, 절대로 세상에 가서, 않삽니다.~~
아마, 천국에 시민이라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냥 천국시민도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성자로써,
이세상에 오기를, 기뻐하면서, 태어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게서는 이렇게 험한 이 세상에 오시는데도,
힘들게 여기지 않으시고, 거역하지 않으시고,
왜 기뻐하면서, 이 세상에 찾아 오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구원받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영광 버리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기뻐하면서, 한 아기로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13절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조그만 항구에, 갔더니 트럭이 프랭카드를 달아 놓고 서 있습니다.
프랭카드에 글을 보았더니,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굴비...’
너무나 황당하여, 한참동안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영광,굴비’ 광고 글이었습니다.
아마 크리스챤인것 같은데, 아이디어가 좀 오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철저하게 낮은 자리에 찾아 오심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오늘본문을 보니까, 천군천사들이, 찬송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평화로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군천사들이 모두 노래하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기뻐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기예수님은 당연히 높임받고, 당연히 영광받으셔야 하지만...
아기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찾아 오셨습니다.
구유위에 누우 셨습니다.
철저하게 낮은자리, 철저하게 겸손의 자리에 오셔서.
구원받아야 할 우리를, 오히려 영광받아야 하실 예수님께서 섬기기 시작 하셨습니다.
죄인과 세리를 찾아가 구원 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깁니다.
가롯유다의 배반과 유다백성들의 죄악에서, 오히려, 십자가의 길로 걸어 가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격을 가지고, 양과 염소로, 의인과 죄인으로 우리를 나눈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 있는 자를, 섬김으로 그 죄가 풀어지게 하여 주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불완전한 자를 섬김으로, 불완전한 것이 덮이어 의롭다 함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열심히 기도 하셨습니다.
성전을 찾아서, 예배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예수님의 탄생은, 구체적 사랑, 구체적 섬김, 구체적 믿음의 모범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느낌입니까? 사랑은 감정입니까? 사랑은 마음입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느낌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의 근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서로가 나누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정이 상하면, 사랑이 없어 졌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교감이 없어지면,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장 4절-7절)
오래 참지 못하면서, 사랑 한다는 말은, 말뿐일 수 있습니다.
온유하지 못하고, 시기하면...., 사랑한다는 것이, 느낌 뿐이었을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무례히 행하며, 성을 내면....,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 뿐이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독생성자의 영광을 버리시고
베들레헴 구유위에 누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섬겨 주시고, 우리에게 믿음의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탄절이 절기로써 끝나서는 않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내가 섬기고
구체적으로,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의 전환점, 분수령, 변곡점, 모멘텀, 그레이트 체인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심으로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섬겨주시고, 나에게 믿음의 길을..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쫓아가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내가, 예수님을 섬기고,
내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길로..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게 되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