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30절 39절 아버지 원대로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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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하였다는 것에서 연유 합니다.
그런데 이장면에는 한가지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신다는 사실을, 모른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상상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는 것을 말리고, ‘재고해 주십시요.’ 부인하고 부정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정도라면, 예루살렘 백성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는 것을 알았더라면, 과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고 맞이하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백성들은 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메시야로써 맞이하였습니다.
이 설명에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어떤 메시야로 예수님을 맞이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올라가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시는... 메시야로 예수님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전적으로, 스스로 바라는 그 메시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환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이스라엘은 독립시키고,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하는 메시야로써,
예수님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좀금만 더 있으면, 로마의 가장 쎈 장군보다가, 더 쎈 장군으로, 모습이 변신되실 거야...
예수님이 조금만 더 있으면, 헤롯왕을 끌어 내리고, 로마총독도 끌어내리고, 이 잘못된 세상을 뒤엎어 버리실꺼아..
예수님이 조금만 더 있으면, 다윗왕 처럼, 주위에 나라들을 싹~ 다 이기고 점령해 버리실 꺼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기대가 부풀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까...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후보가 유세를 하면서 올 때,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 처럼...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 왕에 오르실 수 있어... 로마총독을 쫓아내실 수 있어..
“힘내세요 예수님.”
“예수님을, 지지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기분과 바람에 편승하여, 너나 할것 것이 몰려나와서, 예수님을 환영 하였던 것입니다.
동상이몽, 같은말 다른 뜻 처럼... 전혀 생각이 다릅니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백성들은 환영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게 된것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하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주간을 시작할 때, 감사와 죄송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심을 생각하면서,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1. 내가 바라는 예수님을 바라고 있습니까?
30절 3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 가실 때, 우리는 어떻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심으로, 내 소원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심으로, 그 동안 힘들던 문제가, 이번에 다 해결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는 것을, 나의 관점에서, 내가 바라는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올라 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해결하시는 문제는, 단순히 내가 생각하는 문제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것을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올라 가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의 근원을 해결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시고,
우리 앞에 닫혀있는 천국의 문을 여시려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고,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죄의 근원의 문제...그게 무슨 큰 문제 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그게 무슨 큰 문제 입니까?
우리 앞에 천국문이 꽉~ 닫혀 있는거...그게 무슨 큰 문제 입니까?
로마를 무찌르는게,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헤롯왕을 망하게 하는게,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주변국가를 손봐주는게,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해결하시는 문제를, 중요하다고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생각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장군이 되어서 로마를 무찌르겠다는 말씀은 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합니다.
왕이 되어, 헤롯을 끌어내리고, 주변국을 손보겠다는 말씀을 않하십니다.
그럴때에, 유다인들은 하루밤 지나니까..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여론이 예수님으로부터 막 떨어져 나갑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러실수 있느냐?
이스라엘 독립은 생각도 않하고, 예수님으로는 더 이상 않된다.
예수님은 메시야..메짜도 갖다 붙일 수 없다.
유다인들은, 스스로 메시야의 조건을 다 정합니다.
스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 주어야 된다...만다....다 판결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던 메시야가 아니다.”
“예수님을 로마에 넘겨주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자.”
예수님이 오시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하였던, 바로 그 사람들이...
기분이 바뀌었습니다.
반대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소리를 높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야 된다고,
분노하고, 흥분하고, 야유를 하면서,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몇일만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몇일만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종려가지를 흔들던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예수님을, 나의 입장에,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 메시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내 마음, 내기분에 따라서, 믿음이 오르락 내리락 할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예수님 최고입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너무하십니다. 예수님 무심 하십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듯,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팔랑팔랑...왔다갔다 한다면...
그것은 날 위하여, 죄심을 지시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올라가신, 예수님을 잘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땀과 고통의 의미를, 진정으로 발견하며 보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고난주간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부부이야기를, 방송으로 본적이 있습니다.
부인이 얼마나 ‘대식가’인지.... 식사를 하면, 라면 5인분을 혼자서 다 먹습니다.
라면 5인분을 먹고도 배가 고파서, 돌아 앉아서 비스켓을 또 먹습니다.
살이 얼마나 졌는지, 팔 허리, 다리 이런데 살이 너무 많아서,
살이 곂쳐서..살과 살이 붙어 버리니까...헐고, 무르고, 피부병이 생깁니다.
밥먹는거 외에는 혼자서 할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듭니다.
옆에서 남편은 가만히 보기만 합니다.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먹는것을 줄여야 될거 같은데요”
남편이 조용히 대답합니다. “너무 많이 먹는다고 말하면, 신경질 내기 때문에,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저렇게 먹는거 보면 미울때가 있지만, 어쩔수가 없습니다.”
한참후에 아내가 대답합니다. “아기를 가지고 나서, 폭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살이 빠질 꺼라고 생각하고, 먹고 싶은데로 먹었습니다.
아기를 놓고 난 다음에도 살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먹는량을 줄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조금 먹으라고 할 때,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욕심 이라고 하지요.. 식욕이 참 무섭습니다.
식욕에 스피드가 걸리니까... 먹는데 왜 먹어야 하는지? 얼마를 먹어야 하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방향으로, 점점 더 속도가 붙어버리고, 나중에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속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만들어 주셨습니까? 브레이크입니다.
브레이크가 없이, 속도가 빨라지면 통제불능이 되어 집니다.
적절한 브리에크를 걸어야, 알맞은 속도로 순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은 영적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브레이크입니다.
세상에서 내맘대로 내뜻대로, 끝없이 막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내맘대로 내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대로 행동합니다.
욕심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 하셨습니다.
3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도 왜 모르셨겠습니까?
예루살램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론이 하루밤만에, 뚝뚝 떨어지고, 바람이 바뀌듯 바뀌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방향을 바꿀수 있는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만 해도 됩니다. “로마 총독을 죽여라...헤롯왕을 쫓아내라.”
그러면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와~와~ 일어나서, 알아서 몰려가서 총독의 건물을 뒤집고, 왕궁 불태우고, 자동적으로 다 해결 합니다.
아마...예루살렘 백성들은 ‘예수님은 참 메시야’다...그리고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일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어떻게 화해가 되는 것입니까?
닫혀있는 천국문은 누가 열어 줄수 있습니까?
기분좋은 일과, 몸에 좋은 일은....불일치 할 때가 있습니다.
운동하는 것은, 숨이 차고 힘이 듭니다. 하지만 몸에는 좋습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하지만 몸에는 좋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순종을 해야 합니다.
세상사람의 손가락질과 질시와 멸시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고, 세상사람의 손가락과 질과 질시와 멸시를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상급이요 면류관입니다.
인격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입에 단것 보다, 몸에 좋은 것을, 찾을 줄 압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욕심에 좋은 것 보다, 영혼에 좋은 것을 찾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낼 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나의 영혼에 유익한 매일매일로 보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빌라도 총독도 주저하게 됩니다.
법을 아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불법적인 것임을 알기에, 너무너무 깨림직 합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하여 소리를 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럴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은 너무너무 쉽습니다. 너무너무 편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 께서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그 말 그대로 이행하십니다.
성경 이후의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유세비우스”의 역사책을 보면,
그후, 로마군인들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으로 밀고 들어 옵니다.
3년에 걸쳐서,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삿삿치 훑어 가면서,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도록, 앞장서서 선동하였던, 열심당, 식카리우스들을 모두다 찾아내어 죽입니다.
도망치던 열심당원들은 ‘마사다’에 들어가서, 900명이 모두 자살 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도시전체가 불타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끌려가게 됩니다.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리라’는 말 그대로, 처참하게 이스라엘 전국토와 예루살렘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 피를 우리 후손에게 돌리라’고 말했는데, 예루살렘 대파괴 이후, 유대인들은 예루사렘에, 사는것을 금지당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때 이후 2천년동안, 지척에 살면서도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70년 동안 나라를 빼앗겼는데, 이스라엘은 2천년 동안, 가나안땅에 들어갈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민족이 없어지지 않는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2차 세계대전때는, 유대인, 6백만명이나 가스실에서 죽고 난 다음에야,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2천년은 저주, 6백만의 처형...
성경에 나와 있는, 종려주일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2천년 전에 끝난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과
나의 원대로, 나의 욕심대로, 다른 메시야를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절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고 난 다음, 부활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낼 때...
십자가의 오르신 예수님,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로 보내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게 살아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