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것을 고린도 후서 5장 1절 9절
2005.06.12 06:42:06 조회5677
고린도 후서 5장 1절 9절 확실한 것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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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죄수가 교도소에서 출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곳은 없고, 할수있는 일은 없고, 그래서 닷자곳자로 고위 공무원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한 600명 정도에게 전화를 걸기를....당신이 여관에서 여자와 나오는 사진을 찍어두었으니, 돈을 부치지 않으면 폭로하겠다고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무려 50 여명이 모두 합하여, 2억원의 돈을 주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이 물었습니다. 아니 확실치도 않는데, 협박에 왜 돈을 주었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은 대답하기를...혹시나 해서 그냥 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확실한 것이 없어도, 막연히 불안해 하며 살아갑니다.
혹시나....... 어쪄면...... 이라는 가정속에서,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소망을 잊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비젼을 잊어 버린바 되었습니다.
나의 미래, 가정의 미래, 사회의 미래를 바라 볼때에....
확실한 소망이 찾을수 없는 시대가, 오늘 우리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나의 신앙조차도, 불확실성 속에 있지는 않으십니까?
나는 오늘, 예수님이 주신 구원과 복음에 대하여 분명한 고백과 확실한 소망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 확실한 소망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가 자꾸 변할 때, 불안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론가 이동해야 될때,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고, 이동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영원할 줄 압니다.
나의 가족은 영원할 줄 압니다.
나의 생활은 영원할 줄 압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1년전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 외모만 하여도 얼마나 많이 변하였습니까?
저만 하더라도, 허리 싸이즈가, 2 인치나 늘어난 것을 솔직히 이 자리를 빌어,고백합니다.
계속 20대의 청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정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금방 자라나서, 부모의 품을 떠나서 분가하게 됩니다.
또한 지금 나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모습 그대로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안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한해 한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절에서, 이러한 사람의 삶을 장막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장막은 유목민들이 치는 텐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양들에게 꼴을 먹였으면, 내일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치는 유목민의 텐트, 그것이 바로 장막인 것입니다.
유목민은 안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안주하면, 금방 목초지가 고갈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유목민이었습니다.
양들과 함께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하여, 장막 세우고,
하나님의 법궤를 덥고 있는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언제든지 따라서 움직이는 신앙.....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의 생활이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민족은 불안함이 없습니다.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목초지가 없어지면, 더 좋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로 움직이면 됩니다.
텐트치는 장소가 좋지 않으면, 더 좋은 곳으로 가서, 텐트를 새로 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평이, 불안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붙드려고 할때....근심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게 된다는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순례자의 신앙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확실한 소망은 헛된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느날 노총각 알라딘이 요술램프를 주웠다고 합니다.
알라딘은 옳타구나 평소에 바라는 세가지 소원을 이룰수 있겠다 싶어서 요정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요정이 나타나서 딱 한 개의 소원만 들어준다고 합니다.
알라딘이 억울하여서 말합니다.
“내 소원은 세가지 입니다. 나는 돈, 여자, 결혼이 소원입니다.”
그러니까 펑하고 말한데로 곧 이루어져서..
알라딘은 다음날... 돈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세상의 이야기들은, 또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을 그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곳굿당에서도 정성스러운 살풀이를 사람들이 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는 사람들은, 버릴줄을 모릅니다.
많이 얻고, 많이 자기기 위하여 그곳을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버린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좋은 물건, 큰 물건을 육심 부리지 않고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F
그렇게 버리지 않으면, 성막에 구름이 떠오를때, 구름을 따라서 이동 할수 없게 되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동 할수 있도록, 간단한 생활도구 외에는 버리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거추장스러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 저것, 다 가지고, 또 예수님도 따라 가겠다는 것은 만용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은 버리고, 자기 십자가만 지고 따라 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둘 때, 소망을 잃어버릴수 있게 되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은 동방에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욥도 소망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약대와 양과, 일꾼들을 잃어버리게 될 때, 욥은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세상이 왜 이러냐고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것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대와 양과 일꾼들을 보면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욥은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예수님을 쫓아 갈 때에, 확실한 소망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맥시코의 나코자리 라는 탄광마을에는, 예수님을 잘 믿는 가르시아라는 기관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르시아가 탄광에서 갱도기차를 몰고 나와서 기차를 세우려는데, 사람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가르시아 뒤를 돌아보니, 갱도기차에 불이 붙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불이 다이나마이트를 싣고 있는 화차로 옮겨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마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자 가르시아는 당황하지 않고, 기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와 산속으로 기차를 몰고 들어갑니다.
얼마 후 곧 엄청난 폭팔음과 함께 산 전체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보전된 나코자리 마을은, 그래서 가르시아를 기념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가르시아 같은 기관사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지하철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백명이 불에 타 죽어도, 나만 도망가는 사람...
수 조원의 세금이 낭비되어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 사람...
우리사회가 참 소망이 있으려면, 예수님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가정이 참 소망이 있으려면, 예수님을 쫓아가는 가족 구성원이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됩니다.
내가 참 소망이 있으려면, 나의 생각을 버리고, 내가 소망을 두고 있던, 헛탄한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을 쫓을때, 진정한 소망이, 희망이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예수님을 참 소망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9절 말씀에 사도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 고 고백합니다.
즉 성도는 누구든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백 그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로마의 형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형리의 말을 물리치고, 사도바울은 돌기둥에 기대었고, 형리의 도끼에 머리가 떨어져서 세번 딩굴고, 그곳에는 샘이 솟았다고 전승은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부패해 가는 로마가톨릭을 위하여, 또 세상의 폭압 앞에서 ‘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소리 높혀 외쳤습니다.
성령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하나님은 분명한 고백이 있는 성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확실한 소망되신 예수님을, 분명히 붙잡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줄기되신 붙어있는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신과 냉소주의가 편만한 이 세상속에서, 오히려 더욱 예수님을 붙잡고, 고백하여,
참 소망과 희망속에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