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 7절 13절 남몰래 받는 은혜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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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따먹는 참외가 맛있다고 합니다.
그냥 참외를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다른사람 몰래 먹는 참외는 왜 그런지, 더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도 생겼다고 합니다.
남이 불행하면, 같이 마음 아파하고, 같이 괴로움을 나누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이 불행하게 되면, 그 사람이 탈락하게 되는 것이까, 그만큼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된다 싶어서,
남의 불행을, 마음아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새로운 풍조가 생겼다고 합니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 절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 잘못가서, 불행하게 되어라. 그런 마음이 발동하여~
남이 잘못할때, 계속 잘못된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비교가 좀 어렵습니다만, 은혜도 남몰래 받는 은혜가, 왜 그런지 더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께 돌 던질 때, 나는 믿음이 깊어 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실때, 남몰래 은혜받은 구레네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실때, 울면서 슬퍼하여, 위로받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세상에서 살기 힘들다고 할때, 나는 혼자서 실속을 차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역방향으로 갈 때, 나는 혼자서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 갑니다.
실속을 차리는 믿음, 어떻게 보면 얄밉지만, 얄미워 할수만은 없는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인공은, 예수님께 칭찬받은 백부장이 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책망받을 때, 백부장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얄밎고 속상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믿음없는 시대에 큰 믿음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은 어떻게, 유대인들은 구원에서 탈락하는 와중에, 믿음이 좋다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까?
1. 백부장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란 동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알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군의 장교입니다.
그 밑으로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군은, 요즈음 국인과는 또 상황이 틀립니다.
치안을 담당합니다. 국방을 담당합니다.
사법과 치안을 동시에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 이쯤 되면, 백부장의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밑을 보기 보다는, 위를 볼수 밖게 없습니다.
밑에 부하들 보다는, 위에 상관들을 더 챙기게 됩니다.
“빨리 공을 세워서, 백부장 보다는 천부장이 되고, 나중에 총독이 되어 보아야 되겠다.”
어떤 사람이라도, 야망이 없을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보니까, 백부장은 반대였습니다.
위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밑은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하를 살피는 정도가 아니라, 하인을 살피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 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자~ 하인이라면, 요즘과 같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입니다. 노예입니다.
사람으로 인정해주지를 않습니다.
당시에 하인은, 그저 말하는 동물로 인정되어, 돈을 주고, 사고 팔던 시대 였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동물이, 병이 들어서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치료하다가 않되면, 팔아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당시는 하인이 병이 들어서 일을 못하면, 치료해주기는 커녕, 팔아 버리는 시대 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인의 중풍병, 하인의 괴로움을, 같이 아파하고 같이 괴로워 하였습니다.
중풍병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배탈나듯 아프고, 약먹으면 낮는 병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찾아와서, 고쳐지지 않는 병이 중풍병입니다.
그래서 하인은 일을 하지 못하고, 누워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이 걸린 하인이 집에 누워 있도록, 배려한 백부장...정말 마음이 따뜻한 백부장이 아닐수 없습니다.
남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으로 나누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하인의 하인의 불행을 마음 아파하고, 하인의 괴로움을 같이 나누었던 백부장은,
하인을 위하여, 직접 예수님께 찾아가서 부탁을 드립니다.
6절에 보면, 말씀합니다. “주여, 내 하인의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면, 유대인을 부를 때 “어이~~ 거기 있는 사람 ” 막되먹은 백부장이라면, 막말을 할수도 있습니다.
좀 더 배려해 준다면, “이보시게~~ ” 그렇게 대충 부를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철저하게 자신을 나추어서 예수님을 향하여 “ 퀴리오스, ...주인” 이라고 호칭을 하였던 것입니다.
굳이 관계를 따져본다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호칭하면, 백부장은 예수님의 종의 관계가 됩니다.
형님과 아우도 아니고,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도 아니고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위하여, 가장 낮은 존재, 가장 멸시받는 존재의 자리에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인’으로 부르며, 예수님께 고개를 숙였습니다.
자 이 백부장의 자세, 이방인이라고, 믿음이 없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이 자세는, 모든 믿는 성도들의 모범된 자세와 일치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자세라 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퀴리오스 예수 그리스도” 라고 호칭을 합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부를 때 “주님” 이라고 호칭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예수님을 부를 때 “주님” 이라고 부릅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위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던, 분명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이 이쯤 되니까 예수님은 말씀 합니다. 7절 말씀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정도 마음, 이정도 믿음이 있는데, 내가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가서, 그 하인을....고쳐 주겠다.
백부장은 소원성취 하였습니다.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빨리 관사로 가서, 누워 있는 하인을 고쳐 주십시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데, 여기에는 애매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군 백부장에 집에 갔다더라... 로마군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는데, 예수님이 하필이면, 왜 로마군인 집에 갔셨을까?
로마군은 이방인 인데, 유대인이 이방인과 상종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인데, 왜 예수님을 율법을 어기면서, 로마군인 집에 가셨을까?
백부장이 유대인의 감정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나의 부하만 사랑하는 백부장이었으면, 예수님의 입장은 어떻게 될지 내가 알바 아니고,
나의 부하만 나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이기주의적으로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백부장은 인격이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입장까지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자 이 말을 들을때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아랫사람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입장과 예수님이 어려움 당하실까봐, 생각하고 배려하는, 백부장의 마음 씀씀이...
얼마나 깊은 믿음의 소유자 입니까?
자, 그리스도인이 기도의 제목 때문에, 예수님께 매어달리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자녀들을 생각하며, 지극정성으로 예배드릴 때, 예수님께서 왜 그 믿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정을 위하여, 사업장을 위하여, 작정 기도를 할 때, 예수님께서 애타는 그 기도에, 분명히 귀를 귀울여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배려하고, 예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이 시대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칭찬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너무나 척박한 가운데 있습니다. 제가 전도 하겠습니다.
예수님,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봉사하겠습니다.
모두 믿음이 연약한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섬기고, 헌신하겠습니다.
나의 소원, 나의 상황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입장과 예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그 믿음은,
오늘 이 시대에 칭찬받는, 큰 믿음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는 믿음이 생길수 있었습니까?
2.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능을 확신 하였습니다.
걱정 않하 기로, 유명한 친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평소에 절대로 걱정을 않하는 것입니다.
걱정많은 친구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친구야~ 요즘같이 걱정이 많은 시대에, 어떻게 걱정을 않하는지, 비결을 좀 가르쳐 주세요”
걱정 않하는 친구가 말해줍니다. “너 한테만 특별하게 가르쳐 줄께”
걱정을 하려면, 두가지만 생각해~ 지금 아픈가? 않아픈가?
않아프면 ? 걱정 하지마~ 아프면?
아프면 두가지만 생각해~ 죽을 병인가? 않죽을 병인가?
않죽을 병이면? 걱정 하지마~ 죽을 병이면?
죽을병이면 두가진 생각해~ 천국갈것 같은가? 지옥갈것 같은가?
천국갈것 같으면? 걱정을 하지마~ 지옥갈것 같으면?
지옥갈것 같으면, 한가지만 생각해~ 예수님께 나가서 회개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걱정을 하지마~ “음 그렇구나.”
그래서 걱정많은 친구도, 그 다음터는, 걱정을 않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백부장은 믿음없는 시대에,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백부장은 실속있게,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을 때, 이방인인데도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능을 확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 산으로 올라가셔서 산상수훈을 말씀해 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산에서 내려 오십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는, 소식을 알았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아픈사람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백부장도 당연히, 예수님의 소식에 귀가 쫑긋 할수 밖게 없었습니다.
하인이 괴로워 하고 있는데, 하인을 고칠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소식이 백부장에게 들려 옵니다.
예수님은 병든자를 고쳐 주신 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시면 풍랑도 잠잠하게 된답니다.
자 이러한 예수님의 소식을 들을 때, 유대인들은 전혀 다르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병자를 고쳐도, 꼭 안식일에 고쳐야 되는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일을 하는 것이니,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소식을 들을 때, 백부장은 전혀 다르게 받아 들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는 분이니, 하인의 병을 고칠수 있겠구나~
내가 예수님을 꼭 찾아가야 되겠다.”
똑같은 소식을 들을 때,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믿음이 생겨, 하인을 고칠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즉 똑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르게, 한쪽은 불신앙을 가지게 되고, 한쪽은 철석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11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책망하시고,
13절에 보면, 백부장은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어 주십니까? “네 믿음 대로 될 지어다” 그러고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상황도, 어떤 사람은 불평불만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을이 와서, 무엇 때문에 추수를 하여서....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고~
추수 않하고, 추수감사 예배 않드렸으면 좋겠다.
정말 불평불만으로만, 생각하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똑같은 상황을, 믿음으로 감사합니다.
한해를 잘 보내게 해주시고,... 내가 은혜 때문에 살아 갑니다.
항상 추수할 것이 많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면,
누가 믿음이 있는 사람 이겠습니까?
더욱이, 백부장은, 오늘 본문 말씀보니까, 온정성을 다하여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집에 있는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고, 내 밑에도 군사들이 있어서, 명령하면 그 명령대로 움직이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백부장 천부장 보다 못하시겠습니까?
그저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다 이루어 지니까, 예수님 지금 여기서 명령만 해도, 내 하인이 나을 줄 믿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생활의 지혜가, 믿음의 지혜가 되고,
생활의 교훈을, 믿음생활에 적용하여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분명히 바라 보았던 것입니다.
한해를 보내어도, 감사가 없어도,.. 예수님은 다 이해 하시겠지~
내가 감사 않한다고, 설마~ 예수님께서 진노하시겠어 ?
하나님께 감사하고, 않하고는, 그것도 자기의 믿음이로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8 하반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냉소적으로 배척하고, 힐란하던 당시
백부장은 정말 믿음있게, 예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사모하였습니다.
백부장의 말,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백부장의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립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백부장을 크게 칭찬해 주시고,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깜깜한 밤에 촛불이, 더 빛나듯이
믿음이 없을 때는, 작은 믿음도, 더 빛이 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보살피는,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곤란하게 되실까봐,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베려하였습니다.
더 나가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능을 확신하고, 말씀할 때 그대로 이루어 질 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우리도 백부장 같은 믿음이 되어서, 믿음이 희귀한 오늘날,
예수님께 칭찬받고 예수님게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