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26절 41절 실로암 맹인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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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이제는 고개를 넘어서, 내리막 길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어떻게 다시 힘을 낼수 있는가? 결론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 봅니다. 하지만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나에게 보여주지 못 하바니다.
의외로 눈은 사물을 볼 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하여 줍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착시현상이 생깁니다.
제가 어릴 때, 방안에서 놀다가, 땅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땅콩이 왜 여기에 있지,? 동생들 알기 전에 빨리 혼자만 먹어야 겠다.싶어서, 얼른 그 땅콩을 입에 넣었습니다.
우물우물 씹는데 아무리 씹어도 땅콩 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땅콩이 썩어도 이런 맛은 아닌데, 왜 이렇게 맛이 없을까?”
씹던 땅콩을 손에 뱉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땅콩이 아니라,‘흙색깔 크레옹파스 동가리’였습니다.
흙색깔 이니까 땅콩과 색깔이 비슷합니다. 다~ 써서 동글동글한 동가리가 되어서, 크기도 땅콩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마침 무엇을 먹고싶은 마음이 있을때, 눈은 코레옹 파스 동가리를 땅콩으로 보이게 해서, 저는 눈을 믿고, 크레옹 조각을 땅콩이라고 입에 넣고 앂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게 하기 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착각하여 보도록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눈은 볼수는 있되, 왜곡되어 다르게 보이는 착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상에는 있지만, 볼수 없어서 못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이 볼수 있는 부분은 너무 작기에, 볼수 있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시광선은 가할가 볼시 빛광 줄선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수 있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이라고 합니다.
가시광선 위쪽에는 자외선, X선, 감마선 등등 너무너 많은 빛이 있습니다.
또 가시광선 밑으로도, 적외선, 단파, 중파, 장파전파 등등 너무나 많은 빛이 있습니다.
일예로, 적외선을 볼수있도록 만든 카메라만 하더라도, 사람의 눈으로 보면 깜깜한 밤인데, 적외선 카메라로 보면, 대낮같이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은 못보는 X선을, 볼수 있도록 만든 카메라만 하더라도, 병원에 가서 X레이 사진을 찍으면, 사람은 볼수 없는 우리의 몸속에 ‘뼈’를 선명하게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눈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정밀하게 볼수 있도록 하여 주느냐? 그렇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오늘 분문에는, 두 눈이 있으되, 태어날 때부터 그 두 눈이 깜깜하여, 가시광선 조차도 볼수 없는, 실로암 맹인에 대하여,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실로암 맹인은 두가지 질문을 받게 됩니다.
바리새인으로부터는,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예수님으로부터는, 네가 ‘인자’를 믿느냐? 두가지 질문을 받게 됩니다.
바리새인으로 받았던 질문--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깜깜하게 볼수 없던 너의 눈을, 볼수 있게 하여 주셨느냐?는 뜻이 되겠지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질문-- 네가 인자를 믿느냐? 는 질문은, --지금 네가 보고있는 나를 인자를 믿느냐? 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실로암 맹인의 눈이 어떻게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는지를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맹인의 눈의 시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믿음의 눈이 있는지를, 실로암 맹인이게 질문 하셨습니다.
1. 바리새인은 시력이 부족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32절로 3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실로암 맹인을 예수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맹인의 인생이 너무나 불행하고 저주스러워 예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 니이까? 그의 부모 니이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만들어 실로암 맹인의 눈에 바릅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실로암 맹인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예수님께서 눈에 발라주신 진흙을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날때부터 못보던 눈이,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사 순식간에 소문이 퍼저 나갑니다.
“멀쩡한 눈이 병에 걸려 시력이 약해진 것도 아니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보던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뜨게 되었데요.~”
정말, 생각해 볼수록, 정말 놀라운 사건이 아닐수 없습니다.
없었던 시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사건입니다.
간단한 성경지식과 성경상식을 가지고 판단해 보아도, 이 사건이 무엇을 가르키고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명백하고, 명료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색안경을 끼고, 어떻게든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실로암 맹인이게 질문을 유도 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
바리새인이 몰라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때부터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고, 실로암 맹인에게 어렵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건의 정확한 의미와 사실 대하여, 실로암 맹인은 또박또박 대답을 합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눈을 뜨게 된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에게 주신 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않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날때부터 볼수 없었던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은 끝까지 외면하며, 부정하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도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구속사에, 버림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주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없었던 코로나가 생겼다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사건이 아닐수 없습니다.
코로나만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구속사를 않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바리새인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코로나가 세상에 무엇을 하였으며, 코로나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첬으며..... 어떻게 세상은 코로나에 걸리고, 이제는 또 코로나가 세상에서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까?”
세상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려고 할 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않보려고 하고, 코로나만 보려고 하고, 코로나만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자들은 감람산에 올라가서 맞은편에 웅장하게 서있는 헤롯성전을 바라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보는 것이 헤롯성전이 최고인 것으로 여기며, 불변할 것으로 보고, 영원할 것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도 못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래도,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는 것을, 제자들이 다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40년 후에, 이 일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에 가보면, 2천년 전에 헤롯의 성전은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져, 그 위에 흙이 덮혀서, 위치만 알수 있는, 흙 언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성전의 위치는 알되, 흙이 덮혀 산을 이루었다 하여, 지금은 그곳을 ‘성전산’ 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세계의 평화, 현대의 과학 기술 첨단 문명 얼마나 대단하게 여기며, 그동안 신뢰 하여 왔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문화와 문명과 이성과 윤리와 각나라 사이에 동맹과 무역으로,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계가 아닌가요?
아무리 돌발사건이 발생 된다 할 지라도, 현대의 세계는 그렇게 쉽게 신뢰가 깨어지고,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나 위태하고 부질 없는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역사가 오랜 도시가--건물 하나하나가 문화재인데, 키에프가 그렇게 쉽게 한순간에, 폐허로 바뀔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지막 성경--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의 도시들과 나라들이 마지막에는 다 불타고 폐허가 되는, 아마겟돈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보면서 많은 말들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오늘날도 그대로 이루어 지며, 구속사의 시간표는 진행되고 있다고 한느 것입니다.
어느날 코로나라고 해서 그게 무엇인가요? 하는데 집밖에도 나오지 못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못드리는 상항이, 2년 반이나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3년 반이 아니라서 너무나 다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러므로 코로나 위에 역사하시고, 더 나가서 이 세계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구속사의 계획을 분명히 바라보고, 두렵고 떨림으로, 믿음에 깨어있는, 성도의 시각과 시력과, 시야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각은 볼시 뿔각입니다.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자세 관점, 영어로는 뷰오브 포인트입니다.
시력은 볼시 힘력입니다. 사물을 볼수 있는 눈의 능력, 분해능, 영어로는 어빌리 투 시입니다.
시야는 볼시 들야입니다. 시력이 미치는 범위, 무엇을 가지고 볼수 있는 범위, 영어로는 비저블 필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맹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들으시고, 오늘 본문 39절에 말슴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멀쩡하게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가 소경이란 말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반문 합니다.
그럴때에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야지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시각과 시력과 시야는 사람마다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야가 넓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각이 뚜렷습니다.
바리새인은 눈을 뜨고, 보고 있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며 살필 때, 세상사람들이 볼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력, 믿음의 시야, 믿음의 시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실로암 맹인은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35절 3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더 나가서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 56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도행전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 안수집사님은 특별한 것을 보게 됩니다.
공회 앞에서서 예수님을 증거할때에,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보는데로 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거에 내가 다시 영향을 받아, 내가 보는데로 나도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습니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가게에 갔다가 주인 아주머니가 말합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딱 보니까 목사님 같습니다.”
‘속일수가 없네요. 이러면 얼마나 감사 합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교회 나가세요 그렇게 않 보였는데..전혀 몰랐네요.”
이러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 나가서, 그리스도인은 좋은것이 보이고, 감사가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가 보여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쁜것이 보이고, 원망이 보이고, 다른사람이 흠만 보입니다.
자 그런사람은 세상에서라도 성공할수 있겠습니까?
만약 세상에 어떤 사람이, 허구한날, 마귀가 보이고 지옥이 보인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갈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서도 예수님이 구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외면하는 마음이 들 때,
예수님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즉 “그렇게 나를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는 말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맹인은 예수님을 다르게 바라 보았습니다.
"내가 인자를 믿고자 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까?“
그럴 때 예수님게서 말씀하십니다.“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럴 때 맹인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예수님께 큰~절을 드렸습니다.
즉 맹인은 “예수님이 인자로 보입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시야, 시각, 시력은 바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일 때, 믿음의 길을 가게 되고,
성경말씀을 보게 될 때 성경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예수님이 보일 때, 나의 언행이, 예수님을 닮게 되고,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실로암 맹인 바리새인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믿음이 온전하여져, 예수님을 구주로 바라보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매일매일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행하며 생활하는
한주간이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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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오늘날도 역사를 주장하시고 주관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세계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과 주장하심 아래 있는 줄로, 분명히 알고,
성경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 살아갈 때에, 나에 찾아오셔서,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님을 볼수 있게 하시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행하여,
말씀으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좋은 것을 바라보며, 보내는,
한주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