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38절 42절 나의 중심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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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2022년을 출발 할때에, ‘나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자’ 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갈때에 한 마을에 들어 가십니다. 그 마을에 마르다라 이름하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합니다.
오늘 본문 3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자, 그 집에는 마르다 혼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기에, 예수님께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40절 상반절에 말씀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내가 우리집으로 영접하였데, 다른 집에서는 맛보지 못한 좋은 음식으로 예수님을 대접해 드려야 겠다.~
내가 예수님을 잘 대접하여서, 예수님께서 이집 저집 영접을 받아 보았지만, ‘베다니의 마르다’의 음식이 제일 맛있드라~고 기억하여 주시고, 또~ 다른 사람 앞에서도 칭찬하여 주시도록, 내 솜씨를 발휘해 보아야 되겠다.~
자, 이런 마음 누구나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손님을 초대 하였는데, 김포에서 제일 맛있는 맛집에 데리고 가서 대접을 하여서, 손님이 크게 감동하도록 해 주어야 겠다.~
그런데 한편, 집에 같이있는 동생 마리아는 생각이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3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즉, 동생 마리아는 마음이 언니와는 살짝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독생성자 이시요,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집에 들어오셨는데, 내가 제일 앞자리 앉아, 예수님을 제일 가깝게 직접 만나 뵈어야 되겠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여 주시는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열심히 들어야 되겠다.~
예수님께서, 집에 찾아오신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정성된 마음은, 방향이 약간 다른것을 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내가 예수님을 잘~ 대접해 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인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되겠다. 라고, 같은것 같은데 살짝 방향이 달랐던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이 두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서는 방향이 반대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사람은, 내가 예수님께 잘~ 해드려야 되겠다. 이고, 다른 한사람은, 내가 예수님께 잘~ 받아야 되겠다. 인 것입니다.
이 미세한 차이는, 결국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까?
첫 번째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하게 됩니다.
본문, 4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의 불평은 동생 마리아를 향하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내 동생은 내가 예수님 대접하려고 음식 만드는 이 바쁜것을 알면서도,
예수님 말씀 듣는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않고, 제일 앞에 앉아 있기만 합니다.
예수님, 내동생이 예수님 앞에 앉아 있기 때문에, 결국 나 혼자 일하게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예수님, 어서 빨리 마리아에게, 예수님 앞에 앉아 있지 말고, 언니 마르다 하는일을 도우라고, 마리아에게 명령 하십시요“
자, 그리스도인이 믿음생활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 입니까?
예수님 이지요.
성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봉사요, 직분이요, 교회의 여러가지 활동과 기자재 입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열마나 교제를 잘 나누는지 모릅니다. 서로 칭찬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열심히 모입니다.
하지만 중심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질문을 해 봅니다. “아니, 예수님이 없이 무엇 때문에 모입니까?”
대답을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 하려고 모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이 없이 그저 위로하고, 베려하기 위하여 열심히 모인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느냐? 깊은~ 질문을 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서로서로 직분자를 많이~ 세웠습니다. 그런데 성삼위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드리지 않고, 서로 위로하고, 행사 가지고, 프로그램~ 열심히 합니다.
예배 않드리고, 다른 프로그램 하니까, 교인들이 너무너무 좋합니다. 깨가 쏟아 집니다.~
만약 그런 교회,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중심에 제일 중요한 것이 빠진것은 아닌가? 질문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바리새인은, 너무너무 열심이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열심이 너무너무 있는 것입니까?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책~잡는데 열심히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앞에 나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를 들어내는데, 열심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살짝~ 방향이 정중심에서 비겨나간 열심 이었습니다.
그럴때 예수님께서 곧, 바리새인의 마음중심을 아시고,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중심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중심을 보시고, 마음중심을 아시고, 마음중심을 살피~ 십니다.
욥기 20:2 에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 이니라”
욥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욥은 동방에 의인이라고, 주위에서 칭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방의 의인이라고, 사람들의 칭찬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중심에는 다른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즉, 초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중심이 조급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중심, 이런 마음이, 어찌 욥~ 뿐이 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마르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생성자 예수님을, 나의 집에 영접하여 드린 후에, 마르다의 마음은 초조하고, 조급해 집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데 소홀함이 있지는 않을까? 대접을 잘~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될텐데...
그러니까 마르다의 눈에는 이런 언니의 속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앉아만 있는 마리아가 눈에 들어올 때, 좋에 보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마리아를 따끔야게 야단처서, 언니를 돕도록 왜 않하십니까? ~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불평의 마음으로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 마르다의 말이 이렇게 거칠어 진것은, 마르다의 마음중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초조함으로 가득하고, 마음중심에 조금함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우리 집에 찾오셨는데도 초초하고 조급합니다. 평안과 감사와 기쁨은 하나도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 이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배에 타고 계시면, 불던 풍랑도 잔잔해 지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 이시지요.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직접 영접하여 모셨으면서도, 오히려 생각이 바빠지고, 마리아 때문에 불평이 일어나고,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기뻐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슨일에든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되면 만족하겠다고 할때에는, 만족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끝없는 욕심과 불만족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가 생각하는데로 될 때, 만족하겠다고 하면, 마르다의 만족에 종착역이 있겠습니까?
마르다의 말대로,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마리아를 야단친다 하여도, 곧 다시 마르다가, 또 예수님께 찾아 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을 따라온 손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나를 도우라 하소서, 가만히 앉아있는 아버지가 문제입니다. 아버지도 나를 도우라 하소서~
그 다음에는 예수님, 빨리 내 음식먹고 박수 치소서. 동네방네 다니면서 마르다의 대접과 마르다의 음식솜씨가, 이스라엘에서 최고라고, 소문 네어 주소서~
사람은 무슨 일에서든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얻고, 가질 때 만족하겠다고 한다면, 만족의 끝은, 항상 저만치 또 물러가 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하고 영원한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빈들에서도~ 전하셨습니다.
어떨때는 산에 올라가서 전하셨습니다.
어떨때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전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르다의 대접 때문에, 은혜받고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빈들, 산에, 바닷가에는 마르다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많은사람들이 은혜받고 만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여주시는 구원의 말씀을 들을 때, 크게~ 만족하고, 크게~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르다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공이신데.. 예수님 때문에 은혜받고, 예수님 때문에 만족하게 되는데,
마르다는 내 집에 예수님께서 오셨으니, 내가 예수님을 대접하고, 내 대접이 잘못되면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은혜받지 못한다고 할 때,
예수님 앞에서 불안하고 조급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에는, 영접 하였으되, 나의 마음중심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중심에 초조함과 조급함과 답답함, 바쁨과 다른 것이 자리잡을 때...
나는 예수님 대접하려 하는데, 마리아는 뭐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왜 나를 알아주시지 않는가? 불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나의 마음 중심은, 얼마나 믿음이 충만 합니까?
본문을 요한복음으로 옮겨가서, 요한복음 12장 1절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중심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중심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심이 있음으로 하여, 자기는 움직이지 않지만, 중심은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심의 역할입니다.
태양은 가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태양은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합니다. 태양이 중심에 있음으로 하여, 지구를 돌게 하고, 화성, 목성, 토성을 돌게 합니다.
작게는 지구도 중심이지요, 지구는 달을 돌게 합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중, 유일하게, 90이 넘게 살았다고 하지요.
사도요한은, 나중에 나이가 많아서, 걸어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릴 때는, 청년들이 들것에 사도요한을 실어서, 옮겼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나이가 많아서, 설교는 항상 똑 같았다고 합니다. 손을 들어서 “서로 사랑 하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것 처럼, 서로 사랑하세요”
그러면 청년들이 다시 사도요한의 들것을 들어, 내어 갔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도요한, 똑같은 말만 하는 사도요한... 하지만, 그 사도요한을 보려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구름처럼 그 교회에 찾아 왔다고 합니다.
긴 설교가 아니라, 몇마디 말만하고 마치는 설교지만, 그 설교를 들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큰~은혜’받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큰 기쁨과 평안을 받고 돌아 갔다고 합니다.
큰 대접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대단한 열심을 보아서가 아닙니다.
사도요한이 마음중심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중심에 예수님 만나게 될때,
주인공 되신 예수님께서 역사하여 주신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르다는 달처럼 열심히 지구를 돌지만, 마리아는 지구가 태양을 돌듯,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기, 6일전 사건이 되겠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 즉 마르다의 집을 방문 하십니다.
그럴 때 마르다는 무엇을 합니까? 2절 상반절에 말씀합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즉 마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마지막으로 찾아오셨는데, 십자가의 대하여 전혀 낌새도 채지 못하고, 깜깜하게 무슨 음식 드시고 싶으 십니까? 그러며 잔치할 일을 하기 시작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합니까?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이 마리아의 헌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밑에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제일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예수님의 생각을 알고, 예수님의 뜻과 가시는 길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리아는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때하여 낌새를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마리아는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을 발을 닦아 드립니다.
예수님 앞에서, 둘다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주변적인 사람이 있고, 중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일을 하였으되, 자기의 만족과 기준으로 대접하는 것에 골몰할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전 마지막으로 찾아오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잔치하고 싶어서, 좋은 음식을 못 먹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전, 나사로의 집을 찾으신 것이 아니지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 셨듯이, 십자가의 길은, 부활의 산소망의 길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찾아 오신 것이지요.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또한, 대속의 길이기에, 모진 고통과 괴로움과 대속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게서 왜 찾아오셨으며, 이것이 십자가를 지시기전, 마지막 찾아오신 것임을 깨닫고, 온정성을 다하여, 자신이 준비하였던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며,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믿음에 지혜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할 때, 음식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깨닫고,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는, 믿음의 대접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드려, 예수님의 뜻을 알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예수님 중심으로 걸어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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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2022년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중심에 예수님의 모셔드려, 예수님의 뜻을 알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걸어갈 때,
예수님의 뜻하심이 나와 함께 하며,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나에게 나타나는
한주간으로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