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28절 30절 은혜로운 멍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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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달을 마무리하는 9월달 넷째주일입니다. 합니다. 신실함으로 풍성하게 되는 달로 정하고 보내었습니다.
9월달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며, 또 우리의 그 신실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9월달을 마무리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에 대하여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우리는 어떤 멍에가 있습니까?
인터넷에 누가 글을 올렸습니다. 아리고 쓰리고~ 아리고 쓰린데~ 아린게 나은가요? 쓰린게 나은가요? 쓰린거 보다가는, 그나마 아린게 낫네요..
그나마 나은 ‘아린고개’로, 넘어 갑니다.~
그를듯 해서 고개를 끄득여 보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누군가로 인하여, 어떤 일로 인하여, 아리고 쓰릴때가 있습니다.
자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는 어떡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8절에서 말씀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를 한문사전으로 찾아 보았더니, 근심수 괴로울고, 한글사전으로는 근심, 걱정으로 괴로워 함. 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크고 작고 깊고 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사람은 저 마다의 근심,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그심 걱정으로 인한 수고가, 어떨때는 나를 아리고 쓰리게 할때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아리고 쓰리게 하고~ 나의 생활을 아리고 쓰리게 할때가 있습니다.
또한, 근심 걱정 뿐만 아니라, 어떨때는 ‘무거운 짐’이 나타날때도 있습니다.
무겁다고 하고 하는 것은 벌써, 무게감이 있다고 하는 뜻이지요. 가벼움면, 내가 내힘으로 달랑~ 들고 가면 됩니다.
하지만 무겁다고 하면, 이미 내 힘만으로는 그 무게감으로 힘이 부치게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하여, ‘네게로 오라~’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오면, “쉼을 주시겠다~”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은 어떤 쉼입니까?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즉, 마음이 아리고 쓰리고, 무거운 무게감으로 힘에 부칠 때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게 하시고, 예수님을 배우게 하실때,~ 그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면, 우리가 쉼을 얻는다~ 고 말씀 하십니다.
아니, 않그래도 수고하여 힘이 없고, 않그래도 짐을 져서 괴로운되, 쉬는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는 것이요,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라니, 역설이 아닐수 없습니다.
잠깐, 여기서 ‘멍에’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멍에’는 “소나 나귀의 목에, 엊어 쟁기나 수레를 끄는 목제도구 ”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논이나 밭에서 일할 때, 경운기나 트랙터를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경운기나 트랙터가 아니라, 소나 나귀를 가지고 논일 밭일을 하였습니다.
소의 목에 멍에를 씌웁니다. 그리고 그 멍에에 줄을 달아서 큰 삽과 연결 합니다. 농부가 소를 앞으로 가게 하면, 소는 목에 엊은 멍에 때문에 힘이 듭니다. 하지만 농부가 앞으로 가게 하니까 소는 멍에가 힘들어도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그 멍에에 연결된 삽이 밭을 갈고 논을 갈게 만듭니다.
만약, 소가 멍에가 무겁고 힘들다고,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이리뛰고 저리뛰며 멍에를 벗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런 소가 있다면, 그 소는 논과 밭을 가는데 쓰지 못하는 소가 될 것입니다.
소가 논과 밭을 가는데 쓰지 못한다면, 그 소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영국의 대문호 섹스피어는 헨리4세라는 ‘희곡’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왕관을 쓰려는자 그 무게를 견디라..”
영어로는, “원, 후 원츠 투, 웨어 더 크라운, 베어 더 크라운”
왕은 왕관을 써야 합니다. 머리에 쓰는 왕관이 무겁다고, 왕이 않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가끔, 세상에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멍에가 무겁다고 아버지의 자리를 내려 놓고 가버립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지요. 사연과 설명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를 버리고, 혼자~ 이 산골에 들어와서 사니까..., 마음이 후련~합니다.”
어머니의 멍에가 무겁다고, 어머니의 자리를 내려 놓고 집을 나가 버립니다.
“남편도 모르겠고, 아이들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하여튼 나는 너무너무 아리고 쓰리고 힘들고 괴로워서, 어머니의 멍에, 어머니의 자리를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어지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엄마 엄마, 아빠 아빠...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이쁘고, 기쁨니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교에 들어갈 때, 얼마나 대견스럽고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 기쁨, 그 행복 보다가.....내가 아리고 쓰린것을 참지 못하겠다고, 아버지의 멍에, 어머니의 멍애를 내려놓으면.... 그 사람은, 아이가 주는 기쁨, 가정의 행복을, 얻는 사람이 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향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리고 쓰리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힘이 남아들고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 말씀 하셨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고가 하니라 밤이 새도록 채찍을 맞으시고,
예수님은 무거운짐이 아니라, 채찍맞은 그 어께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인들 왜 그 어깨가 아프지 않으셨겠습니까? 채찍에 맞아, 살이터져 아픈데, 거기에 십자가를 메게 되었으니, 얼마나 살이 아리고 쓰리~셨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만 올라가면 다~ 끝나는가? 아니지요. 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면 메고 갔던 그 십자가 세우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셔야 합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죄악으로 멸망하든지 죽든지 간에, 이 십자가는 너무너무 무겁고~
세상에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속의 사명은 중요하지만, 지금 채찍에 맞아서 터진 어께가, 십자가로 인하여 너무너무 아리고 쓰리니까... 이 십자가를 여기서 내려 놓고, 나는 물좋고 산좋은데 가서 푹~휴양 하다가, 천국에 돌아가겠습니다.고 하였다면,~ 우리의 대속과 구원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예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끝까지 그 십자가를 어께에서 내려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라리 고개가 아니라 골고다 언덕을 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대속의 사명을 감당 하시려, 골고다 언덕위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거기에 달려 죽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다시 태어날 우리를 보실 기쁨으로,
아리고 쓰린~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자리, 메시야의 자리, 구원의 제사장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쁨으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멍에를 지고가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의 멍에 지고 갑니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 더하여, 세상에서 책임과 직책의 멍에를 더~ 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자기멍에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벗겨 주실 때 멍에를,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가벼우며, 나중에는 상급과 면류관이 됩니다.
본문, 30절 말씀을 보게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런데 멍에를 보면, 좋은멍에가 있는가 하면, 나쁜멍에가 있습니다.
가볍고 은혜로운 멍에가 있는가? 하면, 무겁고 멸망의 멍에도 있습니다.
사탄은, 속이는데 명수이지요. 사람들을 향하여, 멍에를 않져도 되며, 자기가 유혹하는데로 하기만 하면, 멍에는 손쉽게 벗을수 있는, 길이 있다고 유혹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8절 9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 하실 때, 사탄은 예수님께도 찾아와서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 공생애 3년동안 아리고쓰리고 고생한 필요가 없습니다.~
골고다의 무거운 십자가도 힘들게 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쉬운길이 있는데, 왜 세상사람들에게 온갖수모를 겪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어려운 길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눈, 딱~ 한번만 감고, 나한테, 절한번만 하시면, 내가 그모든 것을 그냥 다~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다 유혹이지요.~
예수님에게까지 찾아갔는데 하물며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사탄은 누구에게나 찾아가서 유혹을 합니다.
사탄은 학생에게도 찾아가서 유혹을 합니다.
“학생~ 학생~ 중학교 고등학교 3년동안,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쉬운길이 있는데, 왜 밤새워 힘들게 공부를 하는 길로 가려고 합니까?
눈, 딱~ 감고, 내가 시키는데로만 하면, 쉽게~ 점수 나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학생이 솔깃하여 질문합니다. “그 방법이 뭡니까?”
“시험 칠 때, 옆사람거 보고 배껴서~... '컨닝'하면서 시험치면 됩니다.”
만약, 어떤학생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여, 시험칠때마다 컨닝하여 점수를 받고, 졸업을 합니다. 자 그러면, 그 학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험칠 마다, 공부잘하는 아이의 시험지를 보고 배껴서, 점수는 80점 90점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기실력은 하나도 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며,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즉, 사탄은 멍애를 벗겨 준다고 속이지만, 오히려 일이 더 꼬이고, 더 무겁고 더 복잡하고, 더 멸망으로 끝나는 멍애를 더~ 씌워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가 참 멍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나를 복되게 하고, 열매와 기쁨과 행복을 거두는 멍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십자가가 무거울것 같다고~ 받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십자가가 힘들것 같다고~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주시려고 부르실 때, “나는 밭을 샀으매 밭에 나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소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방금, 장가 들었으니 십자가를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달게 받고, 지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이지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도~ 처음에는 어색하고, 만만찮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계속 지고 갈 때, 그 십자가가 점점 익숙하게 됩니다. 또한 그 십자가를 질 때 오히려, 편안하고, 힘이 들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는, 은혜와, 능력의 십자가로 바뀌게 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 6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갈 때, 베드로의 염려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여 주시고~, 베드로의 걸어갈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가는 길을, 돌보아 주시고,
베드로를 높혀 주시는, 베드로 형통케 인도하여 주시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돌보듯,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고가는 성도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양은 생각보다가 할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양 스스로는 생각 합니다. 늑대나~ 이리가 오면, 나의 힘과 능력으로, 늑대와 이리를 물리치고,~
광야가 메마르면, 나의 힘과 능력으로, 시냇물을 찾아서 가고,
나~, 정도의 힘과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정도는 할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양이 늑대와 이리를 싸워 이기고, 시냇물을 찾아서 뛰어 갈수 있습니까?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양이 목자를 따라갈때, 늑대와 이리가 달려들지 않습니다.
양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목자가 무서워서 늑대와 이리는 양에게 감히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또한 목자가 인도하는데로 양이 목자를 따라갈때, 푸른초장 시냇물에서, 평안과 쉼을 얻을수 있습니다.
양이 잘 달려서가 아닙니다. 목자가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의 목자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때, 마귀는 나에 앞에 얼씬도 하지 못하고,
우리가 나의 목자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때, 나의 앞에는 푸른초장 시냇물이 펼쳐지게 됩니다.
내가 힘이쎄서 마귀가 얼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혜와 행운이 많아서 형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도하여주시기 때문에 은혜와 형통과 평안한 것이지요.
가끔 어떤이들은, 나~ 정도의 힘과 능력이라면, 사탄정도는 충분히 물리치고~ 또한 나 정도의 지혜와 실력이라면 계획하는 일마다 척~척~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은, 간단히 식은 죽먹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멀리하고, 예수님의 주신 십자가는 어디 두었는지도 모르고, 탕자처럼 멀리~ 멀리~가기도 합니다만,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9절 20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십자가 였습니다.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돌을 던지며,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동네 였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섰으니 얼마나 박해와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사도바울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를 품고, 온정성을 다하여 돌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를보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를 보냅니다.
그랬더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점점 자라 납니다.
그 믿음의 열매를 보고, 사도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데살로니교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한 것은, 나의 기쁨, 나의 자랑의 면류관이요~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나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고 가면,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그 십자가는 변하여, 나의 기쁨, 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 나의 영광이 되게하여 주실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멍에가 있습니다.
그 멍에가 쓰리고 아려서, 그 멍에를, 내려 놓고자 한 적은 없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나는 잘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 십자가는 나를 평안과 형통으로 인도하며,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그 십자가는 나의 기쁨, 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 나의 영광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주간 동안, 나의 목자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십자가의 능력와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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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 부름받게 하시고,
십자가를 받아, 예수님 뒤를 따라가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 여정이 하나님 앞에서, 열매맺는 여정이 되어서
주님 다시 오실 때, 나의 십자가가 변하여 나의 기쁨, 자랑, 면류관 영으로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갈보리 언덕을 걸어가셨듯이, 한 주간동안 걸어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십자가 붙잡고 걸어감으로 십자가로 승리하는 한주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