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장 17절 21절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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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 “십자가의 도”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라는 말은, 한문으로 ‘길 도’입니다. ‘십자가의 길’ 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의 길’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깊이 묵상하며, 내가 그 길을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1.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은 손으로 만져지는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길,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길은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왜 저렇게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나?
이렇게 편하고 좋은~ 넓은길이 있는데, 왜 굳이 저렇게 좁은길로 가나? 그러면서 십자가의 길을 바라 봅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능력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갈 때, 승리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넓은길로 가지 아니하고, 좁은길,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기뻐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뜻을 이루시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십니다.
그럴 때,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도말되고, 우리가 구원받는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구원의 길’, ‘십자가의 길’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순절에, 그 길을 만드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십자가의 순종을 바라보고,
또한, 그 길을 향하여 가시면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기 시작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자~ 이 보습을 볼 때, 세상사람들은, 반대로 미련한 것으로 바라봅니다.
사순절이라고, 왜? 40일, 기도를 하는가? 참으로 미련하다.~
고난주간이라고, 왜? 힘들게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가? 참으로 미련하다.~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은 사순절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헌신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것을, 미련한 것 어리섞은 것으로 여깁니다.
아니, 십자가의 길 자체를, 미련한 것 어리섞은 것으로 여깁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나를 죽이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돌보고,
성경을 읽고, 사명을 감당하고...
어떻게 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참으로 미련하고, 무~가치한것으로 세상사람들은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유대인들은 갖은 힐란과 비방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럴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조용히 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의 길을 ‘순례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능력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좁은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나는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습니까?
오늘본문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왜에 ‘좁은문’에 도착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나는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수 있는 것입니까?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 교사 선생님들과 산에 간적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봄이 되어서, 우리 부서도, 산에 갔다 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장집사님 하고, 교사 선생님들하고 산에 올가 갔습니다.
한참 가는데, 교사선생님들이 얼마나 체력이 좋은지 성큼성큼 갑니다.
저는 힘이 들어서 땀을 뻘뻘흐리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앞정서서 가던 부장집사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말을 합니다.
“전도사님, 아까전에 왔던곳에 또 왔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힘들다는 불평이 확~ 사라집니다.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방향을 헷갈려, 같은곳만 뱅글뱅글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은 오후 4시~,해가 점점 기울고 있습니다.
다시 산정상으로 올라가서,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는 너무 늦었습니다.
자~, 십자가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자리만, 맴 돌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을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 딴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에는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지혜’, ‘세상의 총명’으로 갈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지혜, 세상의 총명이 아니라, 무엇으로, 내가 가는 ‘십자가의 길’의--‘그 방향’, ‘그 여정’을-- 길을 잃지 않고 잘 갈수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가 되겠습니다. ‘카리스마’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어 보입니다.” 라고 할 때, 바로 그 ‘카리스마’가 되겠습니다.
성경에서 나온 말을, 세상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많이 있지요.
성경에서 ‘카리스마’는 ‘은사’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은사’는 ‘단순한 능력’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실 때,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주시는 능력이, 은사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주실 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럴 때 ‘예언’은 단순히 나에게 있는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더욱 큰~ 사명을 맡겨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도록, 더욱 큰 은사를 주시옵소서”
그럴 때,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십니다.
자, 길을 보여 주신다고 하였는데, ‘어떨 때’ ‘길’이 잘 보입니까?
출발할때는 길이 다~ 않보입니다. 방금 출발하였는데, 벌써~ 결승점이 보일수가 없습니다.
‘마라톤 경기’가 시작 됩니다.
어떤 선수는, 가던코스를 벗어나, 곁길로 달려 갑니다. 코스를 벗어나면, 당연히 더~ 않보입니다. 깜깜해~ 집니다.
경기를 안내하는 사람도, 경기를 감독하는 심판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라톤 코스가 아닌 곳에, 동떨어진 골목에, 안내하는 사람, 감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왜 이렇게 길이 않보이고, 깜깜 합니까? 라고 할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정코스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 반대로 선수가 열심히, 정코스로 달려 갑니다. 그랬더니 높은언덕으로 코스가 나~ 있습니다.
언덕을 올라 가려면, 숨이 차고, 땀이 나고, 힘이 듭니다.
하지만 높은 언덕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멀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변 일대가 다~보이고, 먼곳에 결승점도 보일수 있습니다.
창진이가 훈련소에서 잘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군대에 들어가서 훈련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총쏘는 것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사명이 높아집니다. 소대장 대대장이 되면, 더~ 멀리 보입니다.
“저~ 산너머 적들이 있으니, 빨리 부대를 출동시키세요”
산너머까지 보이고, 산너머의 일들도 알게 됩니다.
장군이 되고, 대장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무너무 멀리 볼수 있습니다.
하늘에 인공위성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고, 정찰기들이 사진을 찍어서 보여 줍니다.
동해, 서해, 남해, 북한을 손바닥 보듯이 보면서, 작전을 짜게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리스마가 커서, 사도바울은 땅끝까지 바라보며, 가장좋은길의 인도하심을 받아,
데살로니가를 거쳐, 로마를 거쳐, 서바나, 땅끝까지 훤히~ 보면서, 복음의 길, 전도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십자가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출발할때는, 얼마를 가야 하는지, 어떻게 길이 나~ 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가면 갈수록, 좁은문에 가까워 지게 됩니다.
또한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멀리까지 볼수 있게 됩니다.
큰 사명을 맡아서, 큰 은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능력이 생겨서 더~ 은혜롭게, 더~ 능력있게 십자가의 길을 갈수 있게 됩니다.
내가 먼 곳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작게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더 가까이--나아~ 가면 갈수록, 예수님은 모습은, 점점 크게 보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손의 못자국, 허리에 창자국이 너무너무 또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면 갈수록, 저 멀리 좁은문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결승점에 도착하게 될 때는, 좁은문은 더 이상 좁은문이 아닙니다. 활짝열린 구원의 문 너머로, 천국의 영화로운 모습이, 모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어디쯤 왔는지 예수님을 바라보면, 좁은문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카리스마와 사명으로 바라보면, 금방 확인이 되어 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길은 어디쯤 왔는지 살펴보며, 가장좋은 길--십자가의 길 가기를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3.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평소 잘 알던 목사님을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키도 크고 몸도 호리호리하고 운동도 잘 하십니다. 테니스를 얼마나 잘 치시는지 아마추어 선수급으로 잘 칩니다.
그런데, 혈압이 평소에 조금 높았다고 합니다. 135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의사선생님이 말합니다. “혈압약을 매일 복용 하십시요”
그러면서 혈압약, 고질혈증 약, 등등을 처방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스스로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한데, 혈압이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되지~”
그래서 스스로 판단하여 약을 줄였다고 합니다. 두알 먹을것 한알 먹고, 한알 먹을것 반알 먹고~ 점차 약을 줄여서 나중에는 약을 끊어야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지어준 약을, 않 먹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평소처럼 운동하다가, 갑작스럽게 풍이와서, 119에 실려가서, 중환자 실에서 치료받고, 겨우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니스를 커녕, 이제는 일반생활하는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완전하지 못한 발음으로, 저에게 말을 합니다. “이목사님, 의사가 주는 약, 절대로 줄이지 말고, 꼭 드세요”
그렇습니다.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교만이 되고, 태만이 되고, 자기기만이 되어, 잘못된 건강생활을 스스로 괜찬다고 하다가, 돌이킬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17절 하반절에는 말씀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길, 얼마나 좋은 길입니다.
예수님께 동행하여 주시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길입니다.
이 길로 가면, 형통합니다.
이 길로 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형통하고, 가장좋은 길로 한참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나의 자신감으로 여길때가 있습니다.
내가 평소에 이렇게 잘되고 형통하고, 아무걱정이 없는데, 왜 거룩생활, 경건생활에 힘써야 하는가?
그런 것은~~ 문제가 생긴 사람이, 않되는 사람이, 하나님께 매어달릴 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고, 스스로 줄이기 시작합니다. 한시간 기도할것 30분 기도하고,
성경 1장 읽는것, 반장 읽기로 하고...
그러면서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점점 줄여서, 나중에는 아예 않해야 되겠다.
1시간을 30분으로 줄이고, 30분을 10분으로 줄이고, 나중에는 기도 않하고 살아가고~
1장을 반장으로, 반장을 한구절로, 나중에는 성경 않읽고 살아가고~
내가 지금 근심걱정 꺼리가 없는데, 점점 줄여야지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욥기 29장 2절 4절에 말씀합니다.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지난세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오기를 원 단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가장좋은 길이요, 안전한 길이며, 구원의 약속이 있는 길입니다.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 축복이요, 그 길을 벗어나는 것은, ‘미련한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좁은문, 구원의 문에 도착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 왜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면, 은사를 주시고, 형통을 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내적외적 유혹에도, 십자가의 길--걸어가기를 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사순절기간,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더~ 가까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한주간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그 길의 깊은 체험과 신령한 은사를 더 하는, 사순절 십자가 여정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사순절을 끝날때에는, 더 가까이 예수님을 뵈옵고,
더 확실히 좁은문을 바라보는, 더욱 깊은 영적 체험자가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도 매일매일 인도하여주실것을 믿고 감사 드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