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9장 20절 염려하지 말라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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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달은 한해를 감사하며 마무리 하는 달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영광돌리는 달”이 되겠습니다.
11월달, 한해를 감사함으로 마무리를 잘할 때, 12월달에는 새해를 잘 준비하여, 시작할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염려’가 아닌가 합니다.
염려할 것이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감사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염려에만 정신을 쓰게 됩니다. 염려하는 문제의 해결이 늦어지면, 힘들어 지고, 원망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눈을 열고, 염려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바라보며, 염려 넘어의 은혜를 감사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인공은 “염려 넘어의 은혜를 체험한 사울”이 되겠습니다.
사울왕은 반면교사입니다.
사울왕의 성격은 순수하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위에서 살아갈때는 한길을 향하여 순수하고 우직하게 걸어가는 발걸음이 됩니다.
하지만 똑같은 성격이 믿음의 길을 벗어날 때는, 돌이키고 회개하여야 하는데, 우직하게 그냥 그대로 갑니다. 돌이키지 않는 어리섞음이 되어 집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처음에는 믿음의 길로, 온전히 잘 출발하여 큰 복을 받습니만, 믿음의 길로 않갈때는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되었습니다.
자, 오늘 말씀은 사울이 왕이 되기전, 믿음으로 잘 출발할때에, 내용이 되겠습니다.
1. 사울은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쪽 3절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의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한 사환을 데리고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염려는 한문으로 생각‘염’ 생각할 ‘려’가 되겠습니다. 국어사전으로는 “앞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또는 그러한 걱정” 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 합니다.
사울의 집은 유력한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1절 상반절에는 말씀 합니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유력한 집안이니까, 작은 집안이 아닙니다. 그 지방에서는 리더쉽을 발휘하는 집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촉망받는 아들이 있습니다. 2절 상반절에는 말씀합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어느날 아버지 ‘기스’가 다급하게 아들 사울을 불러서 당부를 합니다. “지금 우리집에 기러던 ‘암나귀’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으니, 너는 가서 집나간, 암나귀를 찾아 오너라”
그러니까 유력한~ 집안에, 촉망받는 준수한~소년 사울은, 암나귀 한 마리를 찾으려고, 이스라엘, 온 지역을 헤메게 됩니다.
4절에 보면, 에브라힘 산지와, 살리사 땅을 두루다녔으나 찾지를 못하여,
다시 사알림 땅으로 베냐민땅으로, 숩 땅으로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이 모든 지역은 하루만에 다닐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20절에 보면, “사흘전에 잃은 네 암나귀” 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사흘동안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노력인가? 하면, 김포에 있는 아버지가 나귀를 잃어버리고 아들보고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집 아들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려고 강화도를 다 돌아 다니고, 파주를 다 돌아 다니고, 일산을 다 돌아 다니고, 그래도 못찾아서....
그 다음에는 밑으로 내려가서 김포공항 넘어서 송도를 지나서, 안산, 화성을 다 돌아다녀도 찾을길이 없어서, 당진 서산에 내려갔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자, 만약에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집을 나갔다고, 앞산 뒷산 정도 찾아보면, 충분히 잘 찾아 보았다고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단지 만들어서, 도보로 걸어서, 강화도, 파주, 일산을 이잡듯이 돌아다니고,
밑으로 내려가서 송도 안산 화성에서 못찾았다고, 다시 당진 서산에 도착하여, “아까운 우리 강아지, 지금 어디에 있나?... 하고 염려를 한다면...” 이 염려가 정상적인 염려 이겠습니가? 분에 넘치고, 과도한 염려가 아니겠습니까?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들보고 ‘집나간 나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나귀를, 꼭~ 찾아오너라, 무슨일이 있어도 찾아오너라~”고, 당부한 아버지 기스도 과도하게 오버를 하였고,
그 말을 듣고, 집나간 나귀를 찾으려고, 이스라엘 반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울’도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이렇게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염려는 사람의 생각을, 집착하게 만듭니다.
자~ 나귀가 중요합니까? 준수하고 촉망받는 아들이 중요합니까?
염려가 발동이 되면, 사람의 가치판단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 처럼,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서 불행하고,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고,
빨리 그것이 가져야 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그것을 찾으면 된다~ 고 가치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마음이 염려로 인하여 기운이 없습니다. 우울합니다. 염려와 관계된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 나자신이 무가치 하다고 느끼기 까지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가 만드는 이런--나쁜 영향을, 믿음으로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자 오늘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 줄까 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너무 힘이 빠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않되니까 자포자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해도 찾을수가 없구나. 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아버지가 우리를 위하여 걱정할수 있느니, 이젠 돌아가자”고 어께가 축~ 늘어져서, 발걸음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때, 사환이 좋은 제안을 합니다. “이 성읍에는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데, 사무엘 선지자에게 찾아가 보면 어떨까요?”
어떻게 보면, 반전의 장면이 아닐수 없습니다.
나귀 한 마리 잃어버린것 때문에, 점점 일이 커져서, 고생이란 고생은 모두~하고 있는데....
일단 나귀 잃어버린것은 못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뒤로 하고,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 봅시다.~ !
염려가 근심이 되고, 근심이 고생이 되고, 고생이 원망이 되고, 원망히 절망이되고...
이런 염려가 가져다주는 무한반복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염려를 뒤로하고,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염려를 뒤로하고, 성경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염려는 뒤로하고, 예배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어떨때는 염려와 근심이, 마음을 내리 누르는데, 어떻게 찬송이 나올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할수 있습니다.
염려하는 일로 인하여 고생이 심하고, 마음은 힘들고 몸은 피곤한데, 어떻게 성경말씀을 보고 예배를 드리고, 더욱이 어떻게 감사할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 근심의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끊고, 염려를 해결하려면, 염려를 뒤로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한숨을, 푹~ 푹~ 쉬는 습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끝마다, 에휴~ 에휴~ 하는 말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틱~’ 이라고 하지요.
염려와 근심이 극에 달하면, ‘틱 장애’가 생깁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염려로 인하여 생각에 랙이 걸리고, 생각에 정체와 느려짐이 발생 합니다. 그러면 그 사이구간에 ‘틱’이 발생을 하여, 다른 사람이 볼 때, 이상한 습관이 보여 지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틱’이 아니라 ‘찬송’을 하여야 합니다.
‘한숨’과 ‘에휴~’ 라고 말하기 보다는, ‘주기도문’을 외우고, ‘성경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더 나가서, 염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하여서는 기도를 하고, 염려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울은 나귀 한 마리 찾으려, 온 이스라엘을 찾아 다니고, 그래도 못찾아 큰 절망과 근심에 빠질수 있었지만, 그때 다행히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는 결정을 내려서
나귀 한 마리의 염려에서 벗어날수 있는 기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2. 실수와 염려를 넘어선 하나님이 주시는 크신 감사. 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한번은 제가 노회,회의에 참석하려고 출발을 하는데, 너무너무 바쁨니다.
양복도 입어야 되도 넥타이도 매야 하고... 그것만 있겠습니까? 서울갔다 오려면 길이 멉니다. 갔다가 오는동안 목이 마를 때 마실 커피도 준비를 해야 되고...
이렇게 자잘한 부분을 챙기도 보면, 시간이 금방 없어집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하면, 올림픽 대로가 청제라도 되면, 회의시간 보다 늦게 되착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준비하여, 늦었다고 스타렉스를 탈려고 하니까, 정작 ‘자동차 열쇠’를 않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럴 때는, 가끔씩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깜빡깜빡도 유분수지, 어떻게 차를 타려고 나오면서, 자동차 열쇠도 잊어버리고 나올까? 늦다고 하니까, 더 늦게 생겼네...”
다시, 돌아가서 신발벗고, 방에 들어가서, 자동차 열쇠를 찾는데... 세상에나~ 자동차 열쇠 옆에 ‘회의 서류’가 있습니다.
‘회의서류’를 잊어버리고 그냥 출발하면, 가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자동차 열쇠를 깜빡한 바람에, 회의서류를 챙기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감사할수 밖게 없습니다.
“하나님, 자동차 열쇄 깜빡~하도록 하여 주신것, 감사합니다. 자동차 열쇄 깜빡 않했으면, 회의서류 놓고가서 ‘대형 이벤트’가 발생할뻔 했는데,... 자동차 열쇄를 깜빡하여 회의서류를 챙기게 하여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실수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실수를 탓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실수한 것은, 중요한 서류를 챙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울의 염려에서도, 나의 실수를 통하여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사울의 집은, 염려와 고생과, 온 지역을 해메는 방황과, 나귀를 못찾은 결과로 인하여, 상황만 보면 감사할일 기뻐할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 기스가 불평할수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가장 아끼는 나귀도 못찾고 돌아오나”~
사울도 원망할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해도해도 너무하지, 나귀 한 마리가 그렇게 귀중하가? 온 이스라엘을 돌아다니도록, 이 고생을 시키고~”
또한 집착과 아쉬움이 발동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쁜나귀를 어디가서 또 구한단 말인가? 잃어버린 내 나귀 아까워~ 아까워~”
사울도 분이 날수 있습니다. “않될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수가 있는가?”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는 이런 사울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소식을 전하여 줍니다.
본문 20절 상반절에 말씀합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지금, 나귀 한 마리 가지고 염려할 시국인가? 나귀 한 마리는 다~ 하나님께 맡기고,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이게 무슨 이야기 인지? 알듯하기도 하고, 모를듯 하기도 합니다.
나귀를 못찾은 아쉬움과 속상함과 염려를 일단 뒤로하고, 사울이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식사하는데 제일상석에 앉도록 합니다. 이거 점점~ 알다가도 모르는 상황이 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정답게, 사울만 특별히 지붕위로 불러서, 중요한 이야기를, 당부~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함께 밖으로 나가는데, 사환을 앞서 가게 합니다.
멀뚱멀뚱 혼자 서 있는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뿔병을 열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 줍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 하셨느냐,
하나님께서는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 시느니라”
자 이러면, 완전히 반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귀 한 마리를 못찾는 것은, 염려꺼리도 않됩니다.
오히려 나귀를 잃어버려서 찾으려도 하다가 못찾아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세우시는, 어마어마하신 역사하심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때 사울이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 죄송해요. 나귀를 못찾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세우셨어요. 그런데 나귀 못찾아서 속상하고 힘도 들고, 정말 나는 실수만 하고, 능력없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 거 같습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나귀를 잃어버려, 나귀를 찾으려 보내었더니,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서 임금님이 되어 돌아 왔다면,
아버지 기스가 나귀를 잃어버린 것은 오히려 “잘 잃어 버렸다~, 잘 잃어 버렸다~. 그 덕에 우리 아들이 임금님이 되었네~ 하나님, 나귀 잃어버리게 하여 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귀 찾아 3일동안 이스라엘을 헤멘 것도 감사 뿐입니다. 만약 집주위를 살피고 “아버지 나귀 없어요~”하고 그만 두었으면, 사무엘 선지자에게 갈수 있었겠습니까?
나귀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고, 아버지의 말씀에 3일동안 고생하여도 순종하는 과정이, 믿음의 테스트가 되어, 무사히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3일 고생하여 임금님이 되었는데, 3일동안 헤멘것....참으로 잘했네...참으로 감사합니다.~
심지어, 사환에게도 감사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그만 두려고 할 때, 이 성읍에 있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가서 만나자고 했으니, 사환에게도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그리스도인은 근심이 있을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실수는 내가 볼때는 실수요, 나의 염려는 내가 볼때는 염려이지만,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면, 실수는 바뀌어, 도와주시는 과정이 되고, 염려는 더 큰 복을 주시려는 ‘믿음의 테스트’로 확~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내가 볼때는, 소돔과 고모라로 가야, 성공합니다.”라고 롯이 광야길을 참지 못하고, 소돔과 고모라로 가버릴 때,
그 많던 소와 양은 다 없어지고, 몸만 빠져 나오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끝까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감사함으로 살아갈 때, 점점 잘되고, 양과 소는 점점 더 많아지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혹시 나는, 지금 일로 염려 때문에 찬송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기도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지금 염려가 있을 때, 오히려 찬송으로 이기고, 기도로 이기고,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의 기회’로 잘 삼고 있습니까?
말씀을 정리 합니다.
사울은 나귀를 잃어버리고 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무엘 선지자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생활속에서, 노이즈 들리듯-잡음이 들리듯, 크고작은 염려와 근심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면, 나의 실수와 염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 안에 있습니다.
오히려 좋은 재료가 되어, 큰 은혜의 결과에 도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여 주십니다.
믿음으로 생활하여, 염려는, 큰 감사로 바뀌는, 은혜의 한주간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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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만물을 주관하시고, 역사속에 섭리하여 주심을 믿습니다.
크고작은 염려와 근심을 만날 때, 오히려 감사와 찬송과 말씀으로 생활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과정이 되어
나중에는 더 좋은 결과로 마무리 되도록,
하나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