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장 13절 16절 예수님과 동행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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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환절기입니다. 코감기, 목감기에 걸릴수 있습니다.
또한 신종코로나가 아직은 좀 더 주의가 필요한 시기인것 같습니다. 이런때 일수록, 건강생활에 지혜를 잘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제설교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친구들, 그 사람의 주위의 사람들,..... 그 사람과 동행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고 하지요.
친구들이 모두, 학자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 사람은 학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가?
그 주위의 사람이 다 좋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더 나가서, 그 주위의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잠언 13:20 에는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로은 자와 동행하기를 힘을 씁니다. 그러면 나도 여러가지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인생에 지혜, 생활의 지혜, 나아가서 내가 알고 싶은 분야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반대로 미련한 자와 동행하기를 힘을 씁니다. 목사님 세상에 미련한 자와 동행하기를 힘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목사님들과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데, 건너편에 젊은이 3명이 앉아 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딱~ 대학생입니다. 입고 있는 옷~, 가지고 있는 책가방, 모두 대학생입니다.
그런데 말씨가 완전히 다릅니다. “형님~ 밥 먹었습니까?” 완전히 깡패영화에서 나오는 말투, 그대로입니다.
조폭영화니 깡패영화니 그런 영화들이 있지요. 그런것을 좋아하고~ 그런것을 보다 보면,
말씨도, 행동도 그런 투로 바뀌게 됩니다. 나중에는 생활방향도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였습니다.
1. 나는 예수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는, 두 제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니 얼마나 힘이 납니까? 얼마나 기쁨니까?
하지만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지만, 예수님이 없는것 처럼, 걸어가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말씀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즉 예수님과 동행하지만, 예수님과 동행 않하는, 두 제자 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나와 동행하여 주십니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은, 눈이 가리워지고, 귀가 막혀지고, 마음이 닫혀져서,
예수님이 없는것 처럼,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 상태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동행 않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대통령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같은시간, 같은공간에서, 대통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하여 대통령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대통령과 친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같은시간, 같은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념식 할 때, 멀리서 대통령을 지켜보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공적관계요, 일반적 관계요,
대통령과는 거의 모르는 사람, 크게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반대로, 대통령과 전화를 하는 관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대통령과 식사를 하고, 언제든지 대화를 하고,
대통령이 먼저 계획을 이야기 해주고, 나의 아이디어를 대통령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이건 보통수준이 아닙니다. 정말 대통령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데 어떻게 동행하고 있습니까?
뉴스를 통하여 예수님 아는 관계는 아닙니까?
기념식에서 멀리 지켜보는, 공적으로 사무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관계는 아닙니까?
아니면, 반대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예수님과 식사를 하고,
언제든지 예수님께 나의 아이디어를 말씀드리는...
예수님의 친한 벗~,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과 정말 친한 관계로 동행을 하고 있으십니까?
마태복음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성경에는, 예수님과 친하고 깊은, 믿음의 관계로 동행하였던 제자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올라갈 때, 오병이어에 나오는 5천명의 장정이 모두 변화산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따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때에도 만찬가지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따로 3명만 데리고,
병으로 죽엇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에도, 따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더 멀찍이 가십니다.
그리고 다른제자에게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며” “나와 함께 기도하기”를 청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제자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자예수님의 본모습을 보여 주시는 친밀한 제자 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실때에, 온전히 옆에서 잘 보좌하는, 믿음직한 제자 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기도하기를 부탁하는, 기도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세~제자는 각각 특별한 자기의 사명을, 넉넉히 잘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베드로는 어떤 일에든지, 앞장서고 솔선수범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 하였습니다.
요한은 제일 마지막까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자 우리가 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가까우면 이 세제자는 예수님께, 칭찬만 받고 좋은 말만,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더 철저하게 예수님께 야단을 맞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면 않된다고 말씀을 드리니까.....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히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정말 자존심이 상할정도로 따끔하게 야단을 치십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각을 점점 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알아가게 됩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려고 하시는가 보다...”
베드로가 아는 것은, 뉴스를 통하여 여렴풋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께 직접 들어서 아는, 예수님의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예수님에 대하여, 깜깜한 관계의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가롯유다가 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가룟유다에 대하여 야단을 치시고, 가롯유다의 생각을 틀렸다고, 깨우쳐 주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다른 제자들은 성찬식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려고 귀가 쫑긋 한데~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생각에 성찬식은 어디가고 없습니다. 마음은 딴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선선하게 말씀합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철렁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가룟유다는 그 말씀 잘 듣자말자, 얼른 일어나서 성찬식장을 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길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팔아 버리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동행하던 12제자 중에도, 예수님 옆에서 동행하였지만,
정말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가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과 동행하지만, 예수님과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과 관계없이, 세상사람처럼 살아가던 제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8절 19절 에 말슴합니다.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디도’를 소개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디도를 소개하기를, 우리와 ‘동행하는 자’ 라고, 소개를 합니다.
‘동행하는 자’ 란, 함께 길을 가는 사람 이지이요.
사도바울과 같은 길을 가고, 사도바울과 함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받는 자”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설명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으로써 교회앞에 존경을 받는 사도가 아니겠습니다. 그런 사도바울과 같은길을 가고, 같은 일을 한다면... 당연히 디도는, 복음으로써 교회앞에 칭찬을 받는 사람일수 밖게 없습니다.
또한 ‘동일한 주의 영광과’..... 디도는, 목적이 사도바울과 같습니다. 즉 동일한 주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한분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가는 사람~ 입니다.
“우리의 원을--소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소원, 목표가 똑같습니다.
이런 디도를 향하여, 사도바울은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 소개를 하였습니다.
자 이러한 말씀을 볼때에, 오늘 본문의 엠마오 두제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맘이 있는 길로, 걸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만 예수님과 목적과 방향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 알았지만,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 예수님이 머물라고 하시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오히려 반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행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뉴스를 통하여 소식을 들으면서 동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생각으로 각기 제길로 가다가, 잠깐 교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방향으로, 같은길을 가는, 함께 하는 동행이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소원을 같이하여 걸어가는, 깊은 믿음의 동행이 있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과 진실되게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중심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중심에 바둑을 모셔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기독교 신문에 나오는, 큰 교회의 목사님에게,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 입니다.
이 목사님이 처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아무리하여도 교인들이 늘지를 않습니다.
나중에는 마음에 낙망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아무리해도 않되는 사람이구나....그리고 바둑을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둑이 너무너무 재미가 있습니다.
어느날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속에...허~연 머리를 하신 권사님이 앉아 계신것을 보고... 부지불식 가운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권사님이 저기 앉으면, ‘아다리’가 되는데...그 옆자리로 앉으셔야 되는데...”
한번은 바둑을 열심히 두는데, 집사님이 헐레벌떡 사택에 찾아 왔습니다.
‘집사님, 왠일로 저녁에 찾아오셨습니까?“
“목사님, 수요예배는 않드리세요?~ ”
이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그길로 바둑판을 도끼로 깨어버리고, 그때부터 예수님만 마음중심에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명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의 눈을 가리우고~
예수님께서 아무리~ 나의 마음문을 두드려도, 다른데로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여도, 제하여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엠마오 두제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합니다.
나의 가던길을 멈추고, 예수님에게 강권하여 예수님과 지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던길을 멈추고 두제자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떡을 떼어 주시는데...그때~ 제자들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엠마오 제자들이 가던길을 멈추고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과 있을려고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 볼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과 진실로 동행하려 한다면...
내가 가는 길을 멈추어야 합니다. 나의 길의 방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어느 방향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과 같이 지내고,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고,
예수님 중심의 생활로 바뀌기는,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식사 할때도 예수님과 함께 식사 합니다.
일을 할때도 예수님과 함께 일을 합니다.
길을 갈때도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갑니다.
저는, 식사 할 때, 식사기도를 합니다. 식사 할때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하여, 식사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식사할 때, 식사기도를 않하고, 식사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저는 고등학교때, 연합고사를 치고, 컴퓨터가 뺑뺑이를 돌려서, 배치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불교재단에서 하는 고등학교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도시락을 꺼내서 식사를 합니다. 그럴때 저는 ‘식사기도’를 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하나님 저는 불교재단에서 하는 고등학교에 떨어지게 되어 공부를 하지만, 오늘하루도 하나님, 나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불교재단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한번도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3년동안 큰~ 탈 없이, 잘 졸업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부끄러워,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만, 살짝~ 잠깐식 믿음생활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라고 하기는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매일 기도하다가 사자굴에 들어갑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일본순사들에게 붙잡혀서, 옥에 들어가 순교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친밀하게 여기시고, 앞으로 될 모든 일들을, 환상으로 다 보여 주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기도하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목사님, 능력의 목사님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거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는 하나님을 잘 아는, 관계적 동행, 믿음의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청소해야 합니다.
그럴 때, 평소에도, 무슨일을 하든지, 항상~ 예수님과 동행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과 동행하여서, 예수님께서 따로 나를 귀하게 알아주시고 높혀주시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항상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와 동행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고,
그리하여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 높혀주시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불러주시고,
하나님께서 믿음직하게 들어 사용하여 주시는
능력의 성도, 충성된 성도, 믿음의 성도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드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