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게 만들어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2절
2004.10.07 13:28:06 조회4941
좋게 만들어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요즈음 저는 새벽기도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식구들 한가정 한가정을, 빠지지 않고, 기도 할때면, 각 가정에 모습들이 하나 둘씩 떠 오름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각 가정,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마음에 분명히 떠 오름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으로 교회를 나서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 있는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분명히 나에게 전해지십니까?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탕자는 전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탕자는 형님하고, 자기를 비교하면서, 속이 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형님은 재산을 더 물려 받고, 왜 나는 모든 것에서 형님보다 모자라게 대우받는가?
아버지는 형님에게 더 관심이 있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다고 보면서,
탕자는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나에게 물려줄 재산의 분깃을 먼저 주십시오..
그리고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뚝 때어가지고는 집을 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어떨때는 오늘 나도 탕자처럼 예수님의 사랑 느끼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고 있다고 잘못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만날 때 사랑을 알게 됩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잘 만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고, 나중에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어서야 아버지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려고 할때에는,
그동안 워낙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다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자기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한 끝에, 아버지가 화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생각합니다.
19절 말씀---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의 화가 좀 풀리지 않을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즉 탕자는 아버지도 자기처럼 그럴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만나보니 아버지는 전혀 화가 나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변함없이 지극히 사랑하고, 받아 주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집을 나간 다음에 고생할까 걱정되어, 매일 저녁마다 마을 어귀에서 아들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아들이 나타날 때에, 오히려 덥석 달려가 아들을 끓어 안고, 입을 맞추며..즐거워 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탕자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즉 신앙이 약해지고, 또 믿음이 흔들, 흔들 할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적 나약함, 믿음의 위기는, 외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걱정과, 근심꺼리 때문에 믿음이 약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만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약해지고,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시대 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놀라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과 고난이 얼마나 많은지?... 드라마 제목을 고난시대라고 하는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부자들을 보면, 복권 당첨되듯이 행운에 행운이 붙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한명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극복하여 마침내 자수성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1장 4절 말슴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역경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약해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에,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찟으며, 견디셨습니가?..... 우리 아무개 집사를 살리기 위하여 끝까지 내가 이 십자가를 견뎌야지.. 그러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님을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럴때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근심꺼리, 걱정꺼리를 극복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만날 때,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탕자는 사랑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화내면 아떡하지.. 모른척 하시면 어떡하지?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를 얼싸 안고 기뻐하며 종들에게 말합니다.
22절 말씀---“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으면 그 속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에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을때, 나의 죄가 덮혀지게 되고, 나의 한계가 덮혀지게 되고, 예수님의 공로만이, 예수님의 능력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락지라는 것은 권세를 나타냅니다. 금가락지는 아무나 함부러 낄수 없습니다. 더구나 옛날에는 가락지에 도장이 붙어 있어서, 결제를 하고 싸인을 하는 수단으로 사용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발은 신분을 뜻합니다. 에베소서에는 복음의 전신갑주에서,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탕자는 좋은 아버지를 만날 때, 그의 외곡되고 잘못된 삶을, 비로소 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좋은 분을 만날 때 변하게 되어 집니다.
아내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또 학생은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요즈음 다시 에이스로 일어서는 박찬호 선수는 150억원대의 연봉으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박찬호 선수도 초등학생때는 가끔식 육상선수로 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영세 선생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영세 선생님은 박찬호 학생이 야구 투수에 눈을 뜰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찬호 선수는 지금도 오영세 선생님을 아버지 같은 선생님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도 인생이 이렇게 크게 바뀌거늘, 우리 예수님을 잘 만난다면, 얼마나 좋은 변화가 성도에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수님을 만나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덪입게 됩니다.
인내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덕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7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1. 변화에 대단히 적극적이다.
2. 새로운 아이디어에 언제나 열정적이다.
3. 언제나 능동적이다.
4. 정직하다.
5. 의사 표현이 정확하다.
6. 작은 한 가지라도 매듭을 잘 짓는다.
7. 사람을 사랑한다. 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적극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작은 부분이라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럴때 나의 생활속에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예수님께서 주시는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탕자가 아버지 앞에서 어색하였던것 처럼 어색할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부담스러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되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만날 때 즐겁게 되어집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에게는 웃음이 없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탕자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날 때, 마치 두통약을 먹고 두통이 사라지듯이,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24절에서 아버지는 말씀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물론 이 아버지의 관점과 틀린 맡아들에 관점이 있습니다. 맡아들은 탕자를 보고 오히려 화를 냅니다.
‘아버니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탕자가 돌아 왔는데 어떻게 기뻐할수 있다는 것입니까?’ 라고 맡아들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똑같은 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시각이요, 또 하나는 믿음의 시각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때에는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뻐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침울하고, 낙담하고, 그래서 가정에 어둡고, 삶은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관점으로 볼때에는 감사하게 되어집니다.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을 합니다. 기도를 합니다. 말씀을 봅니다. 가정에는 언제나 기쁨이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살려고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여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행동하다 오히려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왕의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세상적 시각으로 보면, 소망이 사라집니다. 후회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도로 만나고 말씀로 만나고 찬양으로 만나는 요셉을 절망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 23절 하반절에는 왕의 감옥에 갖혀있는 요셉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아니 옥에 들어간것이 무엇이 형통한 것입니까? 그렇나 믿음으로 눈으로 볼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그의 범사가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요셉은 곧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하여, 한 집안의 총무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 전체의 총리대신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는 걱정이요, 근심이지만,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볼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보게 되고, 그래서 감사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좋은 것은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기뻐할수 있습니다.
이 한주간도 예수님과 동행하여 큰 기쁨, 큰 변화를 일으키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